사목일기

빈 성탄 구유

namsarang 2009. 8. 24. 21:59

[사목일기]

빈 성탄 구유


                                                                                                    김지한 신부(한국외방선교회 성소국장, 선교센터 원장)


내가 사목하는 마가리아본당은 멘디교구에서 제일 큰 본당이지만 모든 것이 부족하다.

 해발 2200m가 넘는 고지에 위치한 지형적 영향으로 무엇보다 먹을거리가 부족하다. 먹을거리라곤 고구마와 호박덩쿨 비슷한 채소가 고작이다. 주민들은 이것들 외에는 그다지 좋아하는 게 없어 굳이 새로운 작물을 심으려 하지 않는다.

 이 지역은 멘디 시내와 약간(?) 떨어져 있어 문명의 혜택을 받는 것도 거의 없다. 또 본당에서 멘디로 가는 도중에 '문제 지역'이 있어서 나는 일 년에 세 차례 회의가 있을 때만 멘디에 나가 물자를 사온다.

 이렇게 모든 것이 부족하다보니 오히려 크게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산다. 하지만 성탄이 다가오면 왠지 허전하고, 상대적 빈곤감이 엄습해 오곤 한다. 춥지 않고 눈이 없는 성탄을 열 번째 맞으면서도 나의 기억 한 구석에는 성탄 음악, 성탄 나무, 추운 날씨와 하얀 눈, 그리고 선물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곳은 어떤가. 우기가 시작된 때라 비는 계속 내려 눅눅하고 우중충한 가운데 대림시기를 지내고 성탄을 맞는다.

 어느 나라나 비슷하겠지만 성탄이 다가오면 준비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성탄나무다. 이 곳에서는 소나무, 전나무를 포함해 나무처럼 생긴 것은 모두 잘라 성당 안을 장식한다. 잘라 온 나무가지들을 성당 바닥이나 벽 등에 마구 꽂아놓아 미사를 봉헌하러 성당 안에 들어서면 마치 엉성한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두 번째 준비하는 것은 구유다. 이곳에서도 마구간을 만든다. 하지만 마구간을 채울 성상이 없다. 그나마 본당엔 조그마한 구유세트가 있다. 비록 오래된 것이지만 나무로 조각한 멋진 성상들이다. 문제는 이 성상들이 너무 작아 잃어버리면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지난 성탄 때도 내 엄지 손가락 보다 작은 아기 예수님이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난 일이 있었다.

 본당을 제외한 18개 공소에는 성상이 없다. 그래서 각자 취향에 따라 마구간을 만들고 온갖 꽃으로 장식한다. 비록 아기 예수, 성모 마리아, 성 요셉도 없는 텅 빈 마구간이지만 세상 어느 성당의 구유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구유라고 생각한다.

 
 꽃으로 장식된 마구간 안에 어렵게 구한 초 한 자루를 켜 둔다. '생명이 빛이 되어 오심'을 잘 나타내는 장면이다. 고귀한 분이셨지만 인간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일치하는 구유 모습이다. 이런 소박한 구유를 중심으로 하느님의 평화를 이웃과 함께 나누려는 진정한 의미의 성탄미사가 이곳에서 봉헌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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