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심 길거리 넘쳐나는 국적불명 간판들
조선닷컴은 지난달 10회에 걸친 ‘외국어에 중독된 한국’ 연재를 통해 우리 사회의 외국어 오남용 실태를 파헤쳤다. 한글날이 있는 10월에는 그 해독(解毒)을 위한 각계각층의 전문가들과 일반 시민들의 다양한 제안과 제언을 들어본다./편집자 주
길거리로 나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각양각색의 간판들이다. 즐비하게 늘어선 크고 작은 건물의 외벽이 온통 울긋불긋한 간판들로 도배가 되어 있다시피 하다. 실로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 것이 간판이 아닐까 싶다.
검정 바탕에 하얀 글씨, 푸른 바탕에 주황 글씨, 미색 바탕에 초록 글씨, 그 중에서도 노란 바탕에 붉은 글씨가 단연 압도적이다. 내 무지의 탓으로 확실히는 모르겠으되, 이러한 색채의 배합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가장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어서가 아닌가 한다.
비단 글씨만이 아니다. 크기며 모양새도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대개가 직사각형이지만, 더러는 세모꼴, 정사각형, 원형, 계란형을 이루고, 형광등을 단 것,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것 또는 아무 꾸밈새도 없이 밋밋한 것까지 이루 헤아리기가 힘들다.
마치 검열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거기에 쓰인 상호들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로니스펍, 기그, 루비나, 마론, 비노, 오카방고, 프리메라, 리베, 대체 어디서 건너온 건지도 모를 온갖 국적불명의 간판 투성이다. 특히, 이른바 잘 나가는 가게라는 곳들은 하나같이 이런 요상한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을 하고 있다. 물 건너온 것을 선호하는 고객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얄팍한 상술이라고나 할까. 이런 가게에 들어가면 어쩐지 바가지를 쓸 것만 같은 찜찜한 기분이 된다.
어디 간판뿐이랴. 먹고 입고 마시고 자는 데까지 어느 것 하나 외국어투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고,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완구에조차 버젓이 영어식 상표가 난무하고 있으니, 그저 할 말을 잃는다.
우리는 자기 것의 가치를 어찌 그리도 홀대하는 민족인가. 제 나라 말은 격이 낮고 남의 나라 말은 고상하다는 사대주의적 사고, 언제부터 이런 그릇된 관념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한심하고 서글픈 심정이 된다. 옛말에 제 절의 부처는 제가 위하라고 했다. 우리가 우리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것을 아껴줄 것인가.
어쩌다 쌀에 뉘처럼 순우리말 상호를 만나는 수가 있다. 반가운 마음에 눈이 번쩍 뜨이고, 기특한 생각에 어쩐지 정이 끌린다. 이런 가게에는 뭔가 그 집 주인의 품위가 엿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일까,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어 안으로 들어가 손이라도 한번 덥석 잡아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중학에 다니던 시절이 생각난다. 극장 앞을 오가다 보면 출입구 쪽에 ‘조조할인’이란 문구의 입간판이 놓여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나는 당시 그게 몹시 궁금하게 여겨졌었다. 왜 조조(曹操)만 할인을 해 주고 다른 사람들에겐 해 주지 않느냐는 의아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량한 한문 지식이나마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그 ‘조조’가 사람 이름이 아니고 ‘이른 아침〔早朝〕’이라는 뜻임을 알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나저나 여하튼 정감이 가는 말이 못 된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셔츠 가슴팍에 ‘climbing’이란 영문 글씨가 새겨져 있었던 캐주얼 차림의 어느 아가씨 모습도 오래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그 당사자야 물론 태연자약이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내가 도리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었다. 그 아가씨는 그게 ‘올라타도 좋다’는 뜻이란 걸 알기나 하고 거리를 활보했던 것일까. 혹여 서양 사람이 마주 지나치다 아가씨를 어떻게 해코지나 하지 않았는지 노파심이 든다. 일이 잘못되어 불미스런 짓을 당해 놓고서, 나중에 그가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고 변명이라도 하고 나선다면 뭐라고 죄를 따져 물을 것인가.
요새 들어 한자말을 아름다운 고유어로 고쳐 쓰는 경우를 자주 본다. ‘사찰’ 대신에 ‘절집’, ‘양각’ 대신에 ‘돋을새김’, 동거를 ‘모둠살이’, 부부 중 한쪽을 ‘옆지기’라고 쓴 글은 정말이지 품격이 달라 보인다. 그런 글을 만나면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읽고 싶은 마음이 된다.
우리가 대학 다니던 시절만 해도 취미활동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일러 ‘서클’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서클 아니면 아니 되는 줄로만 알았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또래들 사이에서 ‘동아리’란 순우리말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서클이 자취를 감추었다. ‘동아리, 동아리’,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을, 참 아름답고 정겹게 다가오는 낱말이 아닌가.
한글날을 앞두고 우리 고유어의 깊고 그윽한 맛을 다시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