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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하얼빈의거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namsarang 2009. 11. 2. 20:58

[특집]

안중근 의사 하얼빈의거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이토 히로부미 저격, 동양평화와 독립전쟁 일환... 인간 존엄성 및 평등사상으로 다져진 정의와 평화의 수호자... 선교 및 인권운동으로 일제 치하 독립 쟁취 위한 민족의식에 호소... 최후 수단인 전쟁을 통해서라도 국민의 안녕을 수호할 권리


▲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김동원 신부의 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 안중근(토머스)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시민음악회가 22일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누리꾼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 운동을 실시해 마련한 이날 음악회에는 센트럴필하모니오케스트라가 참여해 '안중근 유언곡'등 10여 곡을 연주했다. 일반시민 주도로 열려 그 의미를 더한 이날 행사에서는 안중근 의사 활동상을 소개한 동영상이 상영됐으며, 의거 100주년 기념시 낭송과 유명 인사들의 안 의사 추모 인터뷰도 동영상으로 상영됐다. 사진은 시민음악회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센트럴필하모니오케스트라. 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안중근(토마스)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대회가 22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100주년 기념관에서 개최됐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와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김병상 몬시뇰)가 공동주최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안중근의 민족운동 △안중근의 사상 △안중근과 국제평화 △안중근 정신의 실천을 위한 현재 과제 등 네 가지 주제에 관해 2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이날 발표된 논문 중 안중근의 신앙과 사상을 다룬 5개 논문을 요약ㆍ정리한다.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황해도 천주교회 원재연 박사(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빌렘 신부는 1896년 황해도 전담선교사로 임명되면서 안태훈(안 의사 부친) 집안과 협력해 활발한 전교활동을 전개했는데 안중근도 빌렘 신부를 도와 황해도 각지를 돌며 순회전교에 나섰다. 지속적으로 교세가 성장했던 황해도 천주교회는 1903년 해서교안의 영향으로 교세가 반으로 축소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안중근은 이와 같은 교회 변화와 관련해 스스로 자신의 활동을 자성할 기회를 가졌다. 이후 개인적 차원의 인권활동보다는 민족 구성원 전체의 권익을 신장시키고 조국을 근대화된 자주 독립국으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안중근의 활동은 황해도에 남아 있던 그의 친지와 지역 신자들이 애국심과 항일의식을 갖고 인권사상을 키워나가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안중근이 황해도 지역을 순회하며 벌인 선교활동과 인권운동은 그가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 암울한 고난기를 인내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민족의식을 키워나가는 데 일조했다.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인권운동은 그의 신앙심과 혼연일체를 이룬 애국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당당하게 개화된 문명국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켜낸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는 것이었다.
 

   ▨종교와 폭력의 정당성  프랭클린 라우시(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
 
 한국통감부의 주요 기관지였던 영어일간지 서울신문(Seoul Press)을 통해 일본 식민정책 집행자들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어떤 방법으로 부당하게 몰아갔는지 검토한다.

 서울신문은 빌렘 신부를 안중근에게 회개를 적극적으로 권하는 사람으로 묘사하여 선교사들의 행동에 대한 모범사례로 제시했지만 안중근은 자신의 행동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관련 심문 보고서에 의하면 안중근이 '죄'를 회개한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나 무슨 죄를 언급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게다가 안중근은 고해성사에서 죄를 고백한 후 빌렘 신부가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을 회개하라고 촉구하자 그는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서울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순교자로 묘사했고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선교사들의 친구로 간주했다. 대조적으로 안중근은 미신적으로 그려진 비이성적 인물이었다.

 이토를 죽인 죄를 회개하는 안중근의 이미지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서울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로 상징되는 일본 식민지당국은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는 개화된 옹호자라는 강력한 이미지로 만든 반면 안중근으로 대표되는 한국은 미신에 의해 위험에 빠져 개조가 절실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과 사상적 성격  김동원 신부(중국 대련 한인천주교회)

 안중근은 19살 때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접하면서 세속적 공명심을 버리고 새로운 정신세계에 진입하는 일대 전기를 맞게 됐다. 안중근에게 천주교 신앙은 항상 민족과 나라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었으니 신앙심과 애국심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안중근은 전쟁 중 사로잡은 일본인들을 석방해주는 모습을 통해 생명을 존중하는 자세와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또 전쟁의 위험 속에서도 동료들에게 회개를 권고하고 하느님을 믿어 영생을 얻도록 준비하게 하는 모습에서 신앙적 사생관으로 무장돼 있음을 볼 수 있다.

 안중근의 교회활동과 하얼빈 의거, 순국의 최후에 보여주는 정신은 초기 순교까지 할 정도로 철저하게 행동으로 실행한 선조들의 신앙 전통이 역사 안에서 그대로 전해지고 더욱 발전해 확대된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안중근은 순국 직전 감옥에서 쓴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통해 '정의'와 '평화' 사상의 두 가지 큰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행적은 안으로 성인의 도를 닦고 밖으로는 세상을 다스린다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정신이 신앙을 만나 내면화되고 민족과 세계 역사에서 이뤄진 결과다. 안중근은 편협한 민족주의에 폐쇄되지 않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하얼빈 의거를 결행하게 된 것이다.
 

   ▨안중근 의사와 빌렘 신부 조현범 박사(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로부터 허락 받지 않고 여순 감옥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60일 동안의 성무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문제와 관련해 지금까지 제출된 연구들은 대략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빌렘 신부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사제로서 성사를 줘야 한다는 신념에 의한 행동이라는 설명과 빌렘 신부가 조선인들의 민족운동에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안 의사 사건을 계기로 크게 변했다는 것이다.

 빌렘 신부는 청계동에서 고향 지인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조선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대국적 견지에서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추진한 일본과 조선의 병합으로 조선은 상당한 근대화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안 의사를 찾아간 것은 조선인들의 민족 감정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사제로서 사목적 배려 차원에서 결행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빌렘 신부가 유럽으로 돌아가 파리 신학교 장상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빌렘 신부는 안 의사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대단히 친밀한 우애 내지 애정을 갖고 있었지만 결코 조선인들의 반일 민족운동에 공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안중근 사건의 신학적 고찰  전수홍 신부(미국 아이타스카 주임)
 
 안중근이 거사를 계획하고 실천하는데 있어 그의 천주교 신앙이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안중근은 천주교 교리내용에서 인간 존엄성과 평등사상을 깨우치고 신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앞장서서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또 학교를 설립해 청년들의 교육운동에 앞장섰으며 국채보상운동도 추진했다. 안중근은 천주교 신앙을 접하면서 문명개화 인식을 더욱 깊이 갖게 됐으며 이것은 민족의 독립사상으로 나타났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을 일개의 살인으로 죄악시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당한 전쟁 행위로서 그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가는 윤리신학적 논의가 필요하다.

 신학적 전통은 국가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을 통해서라도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안녕을 수호할 권리가 있음을 언제나 견지한다.

 안중근이 한국침략의 수뇌인 이토 히로부미를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죽인 것은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안중근이 조국의 독립을 넘어서 동양평화를 강조한 데서 세상 만민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쳤던 그리스도교 정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국의 침탈과 부정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이루고자 한 안중근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리=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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