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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 피지의 외딴 마을에 '가·갸, 거·겨' 울려 퍼진다는데…

namsarang 2010. 1. 17. 16:34

[Why]

남태평양 피지의 외딴 마을에 '가·갸, 거·겨' 울려 퍼진다는데…

高大봉사단 현지서 한글교육

검은 피부의 아이가 입을 뗐다. "사랑합..니..다." 아이를 지켜보던 30명의 피지 사람들이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걸 본 황시현(24·고려대 식품공학과 3)씨가 "비나까 비나까!(vee-nahka· 감사하다는 뜻)"라고 외치며 사탕을 건넸다.

남태평양 피지(Fiji)의 오지 마을 나세임비투(Naseibitu)에서 벌어진 한국어 교육 현장이다. 이 마을은 피지의 수도 수바(Suva)에서 승용차로 3시간 이상 떨어져 있다. 오지 중 오지인 이곳에서 왜 한국어 교육이 시작됐을까.

오지 마을의 아이들은 다양한 색깔의 색종이를 처음 접어봤다. 고려대 사회봉사단 김민선씨가 종이 접는 방법을 하나하나 알려주자 그들은 신기한 듯 조심스 레 따라했다 / 윤주헌 기자

지난 9일 고려대 사회봉사단 소속 학생 17명이 이곳에 도착했다. 단장 김익환(53) 관리처장은 "작년 8월 여기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했는데 올해는 한국문화까지 전파하려고 여러 프로그램을 준비해 다시 왔다"고 했다.

고려대 이기수 총장과 학생들은 당시 나세임비투에서 3박4일간 집짓기를 했다. 한국인을 처음 본 현지인들은 고마워하며 "우리는 한가족"이라고 했다. 집 천장에 한국 지도와 민속용품인 제기(祭器)를 건 원주민도 있었다.

봉사단 학생들은 작년 12월 중순부터 팀을 나눠 한글교육·난타·태권도·과학교육 등의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봉사단 팀장 박근우(27·체육교육과 4)씨는 "무조건 한국만 알리면 흥미를 잃을 수 있어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원주민들의 마을회관에 짐을 푼 학생들은 '원주민과 친구 되기'에 나섰다. 높게 뻗어있는 야자수 사이를 맨발로 뛰어다니는 현지 아이들에게 "불라(Bula·현지어로 '안녕'이라는 뜻)"라고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여학생들은 동네 꼬마들을 모아 손톱에 알록달록한 색깔의 그림을 그렸다. 네일아트를 맡은 이유리(24·화학과 4)씨는 "처음엔 한두 명만 손가락을 내밀었는데 나중에는 온통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현지인들과 친해졌다. 마을 어른 길소니(60)씨는 귀한 손님에게만 접대하는 음료 카바(Kava)를 만들어줬다. 청년들은 럭비하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탓에 럭비는 피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다.

나세임비투에 도착한 지 사흘 뒤부터 한글 교육이 시작됐다. 이미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와서 한글을 가르쳐준다"고 소문이 난 상태였다. 교육은 학생들이 숙소로 사용하는 마을회관을 사용했다.

강단에 선 김민선(21·심리학2), 김효심(20·방사선학2)씨가 흰색 전지를 들고 왔다. 전지엔 1부터 10까지의 숫자가 적혀 있었고 그 밑에 한글과 영어 발음 표기가 있었다. "영어로 먼저 하고 한국어로 해봅시다. 따라해 봐요. 하나."

김민선씨가 손가락으로 전지를 가리키며 한글로 읽자 여기저기서 "킥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모여 있던 30명의 원주민들은 "하나, 둘, 셋, 넷" 등 한글로 읽기 시작했다.

"누가 나와서 읽어볼까요?" 옆의 친구에게 떠밀리다시피 나온 이소아(Isoa·20)씨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또박또박 숫자를 읽었다. 사탕을 손에 쥐고 자리로 돌아온 이소아씨는 "한국어가 영어보다 쉬운 것 같다"며 웃었다.

한글로 표기한 '꼬마 인디언'이란 노래를 함께 부르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노래를 부르던 원주민들은 황시현(24·식품공학과 3)씨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추자 함께 일어나 따라서 춤을 췄다.

봉사단은 한글뿐 아니라 마을 도서관 설립에도 참여했다. 고려대는 마을 사람들의 부탁으로 약 8000만원을 들여 99㎡(30평)의 땅에 도서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도착했을 때는 공사의 65%가 진행된 상태였다.

10명의 학생들은 매일 4시간 동안 모르타르 제작·블록 쌓기·지붕에 양철판 설치하기 등을 했다. 학교는 14일 완성된 도서관에 400권의 책을 기증했다. 수바 시내에서 구한 두 대의 컴퓨터와 학생들이 직접 만든 책꽂이도 놓였다.

마을은 시내와 90㎞ 정도 떨어진 오지라 전기도 없어 발전기가 설치되기도 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농부 로바엘(Rovaele·59)씨는 "아이들을 자주 도서관에 보내 책을 읽게 하겠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봉사단은 15일 마을을 떠났다. 주민 40여명이 마을 입구까지 나와 배웅했다. "불라!"를 외쳤던 사람들이다. 안이슬(23·언론학부 2)씨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 정이 많이 든 것 같다"며 마을 아이들의 손을 놓지 못했다.

현지인들은 떠나는 학생들에게 "언제 다시 오냐?", "갔다가 다시 안 오는 거냐?"고 물었다. 길소니씨는 "한국인들이 우리에게 해 준 게 너무 고맙고 우리가 한국에 진 빚을 갚을 날이 오길 기도한다"며 머리 숙여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