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일기'로 식민지 지식인 내면 파헤친 박지향 교수
일기 속 그는 '자유주의자'… 대일 협력 나선 이후에도 일제에 비판적 인식 뚜렷
삶은 훨씬 복잡하고 다면적… 친일 청산 몇년에 될일 아냐
영국사 전공인 박지향(57)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10여년 전부터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가 이끄는 '전파연구(傳播硏究)' 모임에서 '윤치호일기'를 함께 읽었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이자 지식인으로 꼽히는 좌옹 윤치호(1865~ 1945)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간 한문과 국문 그리고 대부분 영어로 일기를 썼다.박지향 교수가 2일 출간한 《윤치호의 협력일기》(이숲출판사)는 나치 점령하 프랑스의 '협력' 등 서양사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대일(對日) 협력에 나서게 된 윤치호의 내면 세계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윤치호는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제에 검거된 이후 흥아보국단 위원장,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되는 등 총독부에 협력했다. 윤치호 개인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협력 또는 순응의 길로 내몰렸던 대다수의 삶을 성찰적으로 모색하는 연구다.
- ▲ 박지향 교수는“‘협력자’를 도덕적으로 매도하거나 협력의 동기를 개인적 욕심과 야 망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 현상에 제대로 접근하는 방법이 아니다”고 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박 교수가 '윤치호일기'를 통해 발견한 윤치호는 '자유주의자' 다. '그는 자유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이라고 믿었으며, 자유주의의 가치인 근면과 자립, 점진적 역사 발전 등에 대한 깊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97쪽) 윤치호는 과격한 단절이 아니라 점진적 개선을 믿었으며 너무 빠른 혁신은 보수주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윤치호가 1938년 이후 대일 협력에 나선 이후에도 일제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그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새로운 지배자들은 예전 조선 황제들의 부패한 관리들의 지옥 같은 정책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다스린다.'(1938년 8월 20일자 일기) 1939년 배영(排英)궐기대회에 회장으로 참석한 윤치호는 '그들이 영국인들을 동아시아의 흡혈귀라고 비난했다'고 일기에 적으면서 자신은 다만 '회장으로 행동해야 했다'고 말한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결성대회가 열렸을 때 윤치호 자신은 고문이면서도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일기에도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윤치호는 1930년대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창궐하는 세상에서 일본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조선 민족이 생존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일본제국의 팽창이 조선인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대일 협력에 나섰다는 게 박 교수의 분석이다. 박 교수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였던 윤치호가 한때 영국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일본식의 파시즘에 잠시나마 동조한 것은 그의 치명적 한계"라며 "그러나 그의 협력은 마지못해서, 그리고 모호한 태도로 이루어졌고, 윤치호가 자발적으로 소신껏 친일을 했다는 일부 연구자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박지향 교수는 "인물사전이나 보고서 몇 쪽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삶의 복잡함과 다면성을 제대로 알고 난 후에야 그를 감히 재단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또 "친일 청산은 관(官)이 나서서 혹은 정부가 임명한 몇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몇 년 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과업은 훨씬 더 많은 연구가 진척되고 훨씬 더 많은 역사적 사실이 규명된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