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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링크 없는 게 장애일 뿐… 이들에게 장애란 없었다

namsarang 2010. 3. 22. 22:51

[밴쿠버 동계 장애인올림픽]

전용링크 없는 게 장애일 뿐… 이들에게 장애란 없었다

 

휠체어컬링 한국 대표팀
빙상장마저 쉽게 못구해 대회전 4주 불완전 훈련… "여건만 되면 세계 최강"

딱 '돌(stone) 하나' 차이였다. 메달 색깔은 '은(銀)'이었지만, 제대로 된 훈련장도 없이 밴쿠버 동계장애인올림픽 휠체어컬링 결승까지 오른 한국 대표팀의 집념과 감각은 세계 최강이었다. 한국은 21일(한국시각) 준결승에서 미국을 7대5로 물리치고, 캐나다와 벌인 결승에서 7대8로 아깝게 졌다.

미국을 이기고 은메달을 확보하는 순간, 대표팀의 유일한 여성 선수인 강미숙(42)씨는 눈물을 쏟았다. "올림픽에서 메달이라도 따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던 일흔여섯 노모(老母)를 떠올렸다. 이름도 생소한 휠체어컬링이지만, 만성 척수질환으로 십 년 전부터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딸이 국가대표가 되어 각종 메달을 따오는 게 노모는 기특하기만 했다. 노모는 이번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강원도 원주의 자택 벽에 손수 못 세 개를 쳤다고 한다. 그러곤 딸이 그동안 따온 메달을 금·은·동 '색깔별'로 걸어 두었다. 귀한 올림픽 은메달을 위해 노모는 못 하나를 더 칠지 모르겠다고 강씨는 말했다. 강씨는 군 복무 중인 아들에게도 은메달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 휠체어컬링은 결승에서 마지막까지 끈질긴 추격전을 벌여 세계 최강 캐나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주장 김학성(가운데)이 동료 조양현(왼쪽)과 강미숙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이 밀어 보낸 스톤이 빗나가자 아쉬워하고 있다. / 연합뉴스
팀에서 가장 생활이 어려운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인 강씨는 "연금(올림픽 은메달은 매월 45만원) 때문에 휠체어컬링을 한 건 아니다"고 했다. 비록 교통사고, 산재, 질환 등 중증 장애로 변변한 직업조차 갖지 못하지만, 이들에게 올림픽 메달은 '돈'이 아니었다. 장애와 싸워온 세월과 당당하게 살아온 자존심에 대한 보상일 뿐이었다.

1990년 교통사고로 장애를 당한 팀의 막내이자 부주장 김명진(39)씨는 "우리가 메달을 따면 후배들이 전용링크 등 나은 환경에서 운동하고, 장애가 심한 사람들도 컬링을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꼭 메달을 따고 싶었다"고 했다.

한국엔 컬링 전용구장이 태릉선수촌과 경북 의성 컬링센터뿐이다. 동호회 팀인 원주 드림(원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 선수들로 이뤄진 휠체어컬링 대표팀은 전용 링크를 얻지 못해 춘천 의암빙상장에서 훈련했다. 컬링을 하려면 빙판에 일정한 마찰력을 일으키는 '페블(pebble)'이란 얼음 알갱이를 뿌려야 하는데, 스케이팅 위주인 일반 빙상장에선 페블을 마음대로 뿌릴 수 없다. 대표팀은 어쩔 수 없이 매끈한 얼음판에서 스톤 방향과 속도 조절 연습만 했다. 대한장애인체육회가 지난 1월 경기도 이천 장애인체육종합훈련원 수영장을 임시로 얼려 컬링장으로 만들어 준 덕에 그나마 4주쯤 기본 연습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팀은 결승에서 2006 토리노 패럴림픽과 2009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인 캐나다와 대등한 경기를 했다. 한국은 전체 8엔드 중 첫 4엔드까지 1―8로 크게 뒤졌으나, 나머지 4엔드에서 6점을 쫓아가는 저력을 보였다.

1991년 산업재해로 다리를 다친 한국의 주장 김학성(42)씨는 패럴림픽 전부터 "훈련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한국이 세계 최강"이란 말을 하고 다녔다. 이 말이 사실임을 이들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대표팀에서 가장 중증인 조양현(43)씨는 은메달을 목에 걸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손의 기능만 살아있지만 휠체어컬링은 잘할 수 있다"며 그는 카메라 앞에서 쇼맨십을 보이기도 했다.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더니 "이제 다 끝났다는 뜻"이라고 했다. 조씨와 경기에 번갈아 출전하는 박길우(43)씨는 "체력 훈련을 위해 선수들끼리 치악산 계곡 옆 언덕을 휠체어로 밀고 올라가던 일도 즐겁기만 했다"고 말했다.

치과의사인 김우택(46) 감독은 "3월 20일은 한국이 동계올림픽 단체전에서 처음 메달을 획득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며 "친구들이 정말 고맙다"고 감격했다. 김 감독은 "이들이 장애를 넘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메달을 딴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