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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언론침략'에 앞장선 주한 일본 기자들

namsarang 2010. 3. 31. 13:00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77] '언론침략'에 앞장선 주한 일본 기자들
 
1909. 8. 29.~1910. 8. 29.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1909년 12월 21일 서울에 주재하는 일인 기자단은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선언서 수천 장을 인쇄하여 일본의 원로와 국회의원들에게 발송했다. 동경의 신문기자단이 '한국문제동지회'를 발기하여 서울과 동경의 일인 기자들이 합동으로 합병을 추진하는 활동을 벌이기로 한 직후였다. 같은 달 4일 일진회가 한일합방 성명을 발표하였으므로 일진회가 앞장서고 일본의 한국문제동지회와 서울의 일인신문기자단이 뒤를 받치는 형태가 된 것이다. 선언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합병함은 전례가 많다. 한국을 일본에 합병하지 않을 수 없음은 내외국인이 모두 아는 바라. 두 나라를 합병하야 피차간 이익 되게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동지자의 품었던 뜻을 실행코자 하여 한일관계의 마지막 해결을 결행하기로 주장하니 분발하라'(대한매일신보, 1909.12.23.)

19세기 말부터 일본은 한국을 크게 네 분야로 침략하였다. 무력침략, 외교침략, 경제침략, 언론침략이었다. 1895년 2월 17일 일본은 외무성의 지원을 받은 '한성신보'를 서울에서 창간하였다. 서재필의 '독립신문'보다 한 해 앞섰다. 한성신보는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펴면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비밀 본거지로도 활용되었다. 신문사 사원들이 낭인 패에 직접 가담하고, 1896년 4월 22일에는 고종의 아관파천을 비웃는 '동요'를 게재하였다가 물의를 일으켰으나 조선은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 언론침략이 본격화된 것이다.

▲ 서울 주재 일본 신문과 통신사 기자들(한일병합 당시 서울주재 일본 기자들. 아래 오른쪽은 경성일보 2대 사장 오오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 발행 신문은 급격히 늘어났다. 이등박문은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와 영어 신문 '서울 프레스'를 창간하여 선전기구로 활용하였다. 서울 주재 일본 신문과 통신사 기자들(한일병합 당시 서울주재 일본 기자들. 아래 오른쪽은 경성일보 2대 사장 오오카)은 진실을 보도하기보다 합방을 추진하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국제여론을 일본에 유리하게 유도하고 한국인의 경계심을 해이하게 만드려는 목적이었다.

1908년 9월과 10월 일본 통감부가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을 재판에 회부했을 때 주한 영국 공사관과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자, 일본 언론은 영국 영사 헨리 코번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이런 선동에 대해 '서울 프레스'조차 "일본 특파원들이 엉터리없는 오보를 본국에 보내는 유감스러운 경향이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서울 프레스, 1908.9.28.)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기자들은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합방이라는 말이 귀에 익어 수천 년 내에 원수로 알던 감정이 사라지고 한국과 일본이 한 집이라는 생각을 양성하고자 함이라"고 지적하고, "저들은 이같이 준비하는 데 한국 사람들은 손을 꽂고 구경만 하니 장래 남에게 부림을 받는 자가 될 뿐이라"고 탄식했다.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한국 신문기자는 동포의 우락(憂樂·근심과 즐거움)을 연구하는 자인즉 시무를 아는 준걸이 그 가운데 있을 듯하거늘 한 단체를 조직하여 저들과 대적하기를 계교(計較)하는 자 없으니 이것이 무슨 연고인가. 우리는 깊이 근심하는 바로다."('신보', 1909.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