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합병함은 전례가 많다. 한국을 일본에 합병하지 않을 수 없음은 내외국인이 모두 아는 바라. 두 나라를 합병하야 피차간 이익 되게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동지자의 품었던 뜻을 실행코자 하여 한일관계의 마지막 해결을 결행하기로 주장하니 분발하라'(대한매일신보, 1909.12.23.)
19세기 말부터 일본은 한국을 크게 네 분야로 침략하였다. 무력침략, 외교침략, 경제침략, 언론침략이었다. 1895년 2월 17일 일본은 외무성의 지원을 받은 '한성신보'를 서울에서 창간하였다. 서재필의 '독립신문'보다 한 해 앞섰다. 한성신보는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펴면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비밀 본거지로도 활용되었다. 신문사 사원들이 낭인 패에 직접 가담하고, 1896년 4월 22일에는 고종의 아관파천을 비웃는 '동요'를 게재하였다가 물의를 일으켰으나 조선은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 언론침략이 본격화된 것이다.
- ▲ 서울 주재 일본 신문과 통신사 기자들(한일병합 당시 서울주재 일본 기자들. 아래 오른쪽은 경성일보 2대 사장 오오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 발행 신문은 급격히 늘어났다. 이등박문은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와 영어 신문 '서울 프레스'를 창간하여 선전기구로 활용하였다. 서울 주재 일본 신문과 통신사 기자들(한일병합 당시 서울주재 일본 기자들. 아래 오른쪽은 경성일보 2대 사장 오오카)은 진실을 보도하기보다 합방을 추진하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국제여론을 일본에 유리하게 유도하고 한국인의 경계심을 해이하게 만드려는 목적이었다.
1908년 9월과 10월 일본 통감부가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을 재판에 회부했을 때 주한 영국 공사관과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자, 일본 언론은 영국 영사 헨리 코번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이런 선동에 대해 '서울 프레스'조차 "일본 특파원들이 엉터리없는 오보를 본국에 보내는 유감스러운 경향이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서울 프레스, 1908.9.28.)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기자들은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합방이라는 말이 귀에 익어 수천 년 내에 원수로 알던 감정이 사라지고 한국과 일본이 한 집이라는 생각을 양성하고자 함이라"고 지적하고, "저들은 이같이 준비하는 데 한국 사람들은 손을 꽂고 구경만 하니 장래 남에게 부림을 받는 자가 될 뿐이라"고 탄식했다.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한국 신문기자는 동포의 우락(憂樂·근심과 즐거움)을 연구하는 자인즉 시무를 아는 준걸이 그 가운데 있을 듯하거늘 한 단체를 조직하여 저들과 대적하기를 계교(計較)하는 자 없으니 이것이 무슨 연고인가. 우리는 깊이 근심하는 바로다."('신보', 1909.12.25.)
'창(窓) > 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렸다, 33㎞… 세계로 뻗어라 새만금 방조제 오늘 역사적 준공 (0) | 2010.04.27 |
---|---|
[천안함 침몰] "해마다 집 고쳐주던 그 착한 군인들이…" (0) | 2010.04.03 |
전용링크 없는 게 장애일 뿐… 이들에게 장애란 없었다 (0) | 2010.03.22 |
장애인올림픽 크로스컨트리 처음 완주한 서보라미 (0) | 2010.03.21 |
이해인 수녀 "법정스님께..." 추모글 전문 (0) | 2010.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