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모 신부(인천가톨릭대 교수)
쌍둥이라고도 불리는 토마스 사도에 관한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묵상하게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뵈었다고 기뻐하는 모습 속에서, 토마스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토마스는 부활의 신비 앞에 자신의 마음을 굳게 닫고 있는 전형적 인물로 나타납니다. 토마스는 열두 사도 중 하나였습니다. 주님을 곁에서 직접 체험했던 이른바 직제자였습니다. 주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신비 앞에선 굳게 닫혀있습니다.
어쩌면 이 모습은 우리 안에 내재돼 있는 닫히고 고집스런 마음일 수 있습니다. 닫히고 고집스런 마음으로는 주님의 신비를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믿음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알면 알수록 점점 커져만 가는 신비 속으로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폐쇄적인 마음 안에 주님을 가둬 놓곤 합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자신의 사고 틀에 주님을 가둬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더 많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더 많이 묵상하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더 많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심지어는 주님을 자신의 잣대로 재보기도 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로우신 주님은 이미 우리 생각 틀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살아계신 주님 현존을 느끼고 체험하는 모습을 보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토마스처럼, 우리의 보다 큰 문제는 주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아주 잘 아는 듯이 생활하는 믿음의 우월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토마스는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호언한대로 못자국과 상처를 찾기 위해 주님 몸을 당연히 살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시선을 돌려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고 말씀하신 후에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요한 20,27-28). 우리 신앙은 주님 현존에 대한 외관상 증거나 목격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 체험과 믿음을 근거로 삼을 때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토마스는 주님 사랑의 시선을 누구보다 더 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우월감이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뵈었을 때에 자신만 빠졌다는 서운하고 미운 마음으로 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토마스가 공동체 안에서 자신에게 너무나도 높은 가치를 매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토마스를 질책하기 보다는 당신을 만져봐야만 믿겠다는 요청을 들어주시며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보고도 믿지 않던 이들에게도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주님은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우리를 성령이 주시는 평화와 용서로 감싸주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도들에게 성령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은 우리 믿음을 일깨워 용서와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함께 하거나 사랑을 나눈 체험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뿌리가 됩니다. 사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이런 소중한 체험들을 서로 나누고 믿음이 부족한 형제들을 격려했습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배려해주는 평화의 삶 속에서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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