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모 신부(인천가톨릭대 교수)
부활성야 첫 예식은 새 불의 축복으로 시작됩니다. 그 불은 죽음과 같은 종살이에서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을 이끌던 불기둥을 상징합니다. 이제 주님 현존의 상징인 성령의 불꽃이 우리 모두에게 나눠질 때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늘어나면서 어둠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불꽃이 우리 내면을 환히 밝혀주는 거룩한 변모의 빛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부활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참으로 복된 밤, 하늘과 땅이 결합된 밤,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된 밤! 그러므로 주님, 주님 영광 위하여 봉헌된 이 촛불을 끊임없이 타오르게 하시어 이 밤의 어둠 물리치소서. 향기로운 제사로 받아들이시어, 밝은 천상광채에 합쳐 주소서. 샛별이여, 이 불꽃을 받아들이소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인류를 밝게 비추시는 샛별이여."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친교가 단절된 이후 이제 주님을 통해 다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거룩하고 영광스런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쏟아지는 주님 생명과 사랑을 은총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주님의 이런 은총을 당신 어록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결단의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결국 '뜻대로 하소서'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죄인이다. 허물이 큰 사람이다. 하느님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는 대 죄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오히려 이런 죄와 허물을 통해서 - 사도 바오로가 죄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리셨다(로마 5,20)고 하신대로 - 당신 사랑, 당신 자비, 당신의 그 풍성한 용서의 은총을 깨닫게 하여 주셨다. 달리 말하면 나는 죄로 말미암아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믿게 되었다. 아니, 하느님은 죄까지도 당신 은총의 기회로 삼으셨다." 우리는 삶의 극심한 고통 중에 받았던 위로와 행복의 순간, 시련을 겪고 있던 어둠의 시간에 체험한 빛의 은총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뿌리가 돼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신앙의 눈을 뜨고 살아계신 주님이 어디에 현존하고 계시는지 찾아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발견되고 체험되는 곳, 바로 그 곳에 사랑의 삶이 발견됩니다. 절망으로 점점 더 어두워지는 곳이 있다면, 주님의 빛이 비추도록 사랑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의 크기를 말합니다. 사랑이 큰 사람은 다른 이를 크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로 내리누를 때는 상대방을 작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이 큰 사람은 다른 사람이 크도록 도와줍니다. 다른 사람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피우고 그 사랑이 자라게 해 상대방을 크게 합니다. 다른 이 안에서 나는 작아지고 상대방은 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는 제자들 모습에서도 이런 사랑이 드러납니다. 막달레나는 어두울 때에 무덤을 찾아갈 만큼, 주님을 향한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주님 뜻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달았던 요한은 주님의 사랑받던 제자로 사랑을 베풀 줄 알았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사랑을 깨닫는 데에 항상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행동하던 제자였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사랑의 체험들로 이뤄집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바로 역사적 구원 사건이 일어난 그곳에 함께 모이듯이, 우리는 주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 미사 제단에 함께 모인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사랑의 일치를 이룹니다.
차갑고 어두운 무덤 속에서,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듯이 보이는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죽은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주님 생명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확실하고 명료하게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은총을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삶을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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