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모 신부(인천가톨릭대 교수)
오늘 복음 말씀을 읽을 때면, 영신수련 때 지도 신부님이 제게 하신 질문이 늘 떠오르곤 합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그물을 쳐서 당겨 올리면 무엇이 그물 안에 걸려나옵니까?"
그 신부님이 하시고 싶었던 말씀은 물속에 그물을 던져 끌어 올리면 물고기만 걸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가라앉아 있던 더러운 찌꺼기들도 함께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속에 그물을 쳐서 당겨 올리면 자신이 혐오하고 숨기고 싶은 더러운 찌꺼기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선한 것 뿐 아니라, 이런저런 부끄럽고 약한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가장 나약한 부분이 나중에 가장 선한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미약한 부분 때문에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더 체험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가장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는 고목이 되듯이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한 베드로 사도 일화 속에서 주님의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봅니다.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은 고기를 잡던 옛 일터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날이 밝아 올 때, 주님의 현존은 희망의 빛으로 나타납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21,6).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그분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되자마자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듭니다. 마치 창조 때에 아담과 하와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부끄러워했듯이 말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방황했는지 모릅니다. 믿음의 의혹, 자신이 저질렀던 후회스런 행위, 여러 착잡한 심정 속에서, 모든 것이 처음 시작됐던 그 출발점을 되돌아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뜻밖에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고 부끄러움이 앞섰던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에서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온 나약한 모습에 대한 반작용인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만이 자신을 용서하고 다시 한 번 일어설 용기를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를 향한 세 번에 걸친 사랑에 대한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여정에서 당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그 행위를 만회하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베드로의 말은 자신이 주님을 부정했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며 인정입니다. 비로소 베드로에게 새로운 기회가 제공됩니다. "나를 따르라"(요한 21,19).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사람은 결코 나면서부터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라는 미로 속에서 긴 여로를 지나온 후에야 비로소 단순한 빛 속으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고 하느님은 단순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느님께 가까워지면 질수록 신앙과 희망과 사랑에 있어서 더욱더 단순하게 되어갑니다. 그래서 완전히 단순하게 될 때 사람은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랑은 준만큼 받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랑은 자신이 받은 만큼 떼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상대방을 온전히 믿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신뢰와 믿음의 관계가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베드로가 변화된 그 뿌리에는 주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대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님 사랑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게 될 제자의 사랑과 변화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과 신뢰야말로 바로 주님께서 양떼를 돌볼 목자를 양성하시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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