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부활 제4주일에는 3년 주기로 돌아오는 모든 전례력에 나타나듯이, 항상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목자와 관련된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래서 이 날에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 불리는 성소주일을 기념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성소에 응답하는 모든 이가 착한 목자가 되기를 요청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날은 주님 은총 속에 이뤄지는 사제직과 봉헌 생활의 성소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날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모든 성소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으로서 성소에 응답하는 모든 이가 바라보고 걸어가야 할 목표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에 응답하는 모든 이는 착한 목자가 양들을 어떻게 길렀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착한 목자에 관한 복음은 양들을 향한 목자의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비유 핵심은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요한 10,11).
착한 목자에 관한 요한복음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이런 총체적 전망에서 바라봐야 그 의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오늘 복음은 전후 문맥상, 유다인들 사이에 계속돼 온 메시아 논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인지에 관한 논쟁이 치열해지면서, 주님을 향한 유다인들 증오와 적개심이 더욱 고조됩니다. 주님과 유다인들은 성전 봉헌축제 때에 성전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요한 10,22).
주님이 메시아인지에 대한 유다인들의 끝없는 불신에 대해 주님 대답은 명확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7-30). 주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과 달리, 주님을 불신하는 유다인들은 주님 음성을 듣지만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아들이시며 메시아란 사실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알아듣지 못한다기보다는, 받아들으려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맹목적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사람을 움직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자신들이 지키려고 하는 가치기준 안으로 주님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만을 위해, 같은 편이 아니면 마음의 문을 닫는 폐쇄적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 명예와 영광을 서로 주고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질책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3-44)
당신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음성을 진정으로 듣는 사람들은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 금년 제47차 성소주일 담화에 이런 권고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특징은 깊은 사랑의 친교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특별히 사제는 친교를 이루는 사람으로, 모든 이에게 열려 있고, 선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양 떼를 하나로 모아 분열을 극복하고 균열을 치유하며 갈등과 오해를 풀고 죄를 용서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의미는 주님에게서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모든 것을 믿는 사랑의 친교입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세상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손길이 아기를 보듬어주듯이 주님 손길이 우리를 사랑으로 보듬어주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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