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시는 당부와 약속 말씀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탁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실천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과 실천은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떨어질 수 없는 유대감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 역할을 합니다.
두 번째는 이 결속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성령 파견에 관한 약속입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세 번째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에 늘 함께 한다는 약속의 징표로 평화를 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우리의 문제는 주님을 깊이 신뢰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역량으로 모든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내적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한 주님의 현존은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평화는 매일 일상생활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징표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신비에서 내면 평화를 체험합니다. 이 내적 평화는 매일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체험하도록 이끕니다. 주님은 우리 내면에 평화를 불어 넣으시고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모든 공동체는 주님 평화와 현존을 체험하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 안에서 살아가도록 사명을 부여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리토'는 보호자, 위로자, 협조자라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생에서 하느님의 올바른 길을 찾고 선택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고 위로하며 조언하는 역할을 하기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신앙 때문에 겪어야 할 어려움과 번민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를 지탱하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올바른 방향을 찾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끊이지 않는 성령 사랑의 불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이 주시는 은총에 안주해 그것만을 자신의 위안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부끄러운 평화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외면한 채, 일시적 안정만 바라는 피상적 치료 구실밖에 못합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실천을 동시에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을 '파라클리토'라고 부르는 데는 단지 성령의 역할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우리가 본받고 살아야 한다는 사명이 내포돼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듯이, 우리는 또 다른 보호자(요한 14,16)가 돼 아픔과 상처, 수치와 분노, 죄책감 속에 살아가는 형제들에게 진정한 내면 평화를 주는 '파라클리토'의 사랑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2코린 1,3-4).
이런 사랑의 역할은 우리의 능동적인 선한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작은 노력을 갖고 사랑을 부어 줄 대상이 어디 있는지 시선을 자신에게서 형제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평화를 구하는 기도'에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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