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대한민국 제1호

성악가

namsarang 2010. 4. 13. 20:22

[대한민국 제1호]

성악가

  • 김성현 문화부 공연팀장 

 

                     ▲ 윤심덕(1897-1926)

소프라노 윤심덕 '死의 찬미' 남기고 투신

1920년이 되면서 이 땅에서도 서양 음악회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1920년 한 해에만 5월 4일 일본 소프라노 내한 독창회, 5월 25일 연희전문 자선음악회, 6월 9일 경성악대 연주회, 10월 7일 스미드 목사 환영음악회, 12월 19일 베토벤 탄생 150주년 기념 음악회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스미드 목사 환영 음악회의 프로그램에 따르면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 피아니스트 김영환과 함께 소프라노 윤심덕, 피아노 윤성덕, 바리톤 윤기성 등 3남매가 나란히 출연했다.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6)은 같은 시대에 활동한 한기주와 함께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이자 최초의 전문 성악가로 꼽힌다.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교회 권사 가정에서 태어나 평양 숭의여학교와 경기여고의 전신인 경성여고보 부설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음악에 재질 있는 사람들을 선발해서 일본 도쿄의 우에노 음악 학교에 유학을 보냈는데, 윤심덕은 여기에 선발됐다.

우에노 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윤심덕은 오페라 아리아와 슈베르트 가곡을 부르며 장안의 화제가 됐다. 당시 종로 YMCA에서 열린 귀국 독창회는 한국 여성 성악가 최초의 리사이틀로 꼽힌다. 당시 신문 기사처럼 "눈이 크고, 입이 크고, 명랑한 성격 그대로 자신을 호탕하게 내던져버리는" 윤씨는 무대에 서기만 하면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화제의 초점이 됐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에도 세 명의 청년이 따라왔다는 소문이 나돌 만큼 인기가 많았다.

1926년 윤심덕은 연극단체 '토월회'의 '동도'(東道)라는 연극에서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다. 1926년 7월 일본 오사카의 녹음 스튜디오에서 '메기의 추억' '망향가'와 함께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사(死)의 찬미'를 녹음했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루마니아 작곡가 이온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의 선율에 직접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는 염세적 정서로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정작 윤심덕은 그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레코드 취입 직후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관부연락선에 올랐던 1926년 8월 4일 새벽, 바닷물에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은 "부산으로 향하던 배가 대마도를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전했다. '현해탄의 정사(情死)'로 보도된 당시 사건의 여주인공이 윤심덕이었다. 함께 투신한 남성은 연극동우회를 조직하고 한국 근대 연극을 이끌었던 김우진(1897~1926)이었다. 이들의 죽음이 알려지자 음반사들은 광고를 내고 "눈물에 싸인 윤심덕의 마지막 노래 '사의 찬미' 불원간 발매 개시"라고 선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