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名筆' 개발, 출시가격 300만원
1970년대까지 국내에선 손으로 직접 쓰거나 타자기를 쳐야만 문서작성이 가능했다. 서류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으며, 수정을 하기는 더욱 어려웠다.1982년 여름 어느 날, 서울 하월곡동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기초소프트웨어 연구실. 당시 연구실장이었던 이기식 박사(65·아이티젠 회장)〈왼쪽 사진〉와 4명의 팀원은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컴퓨터 화면 내에서 자유롭게 문서 내 글자크기·모양을 바꿀 수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한 팀원이 외쳤다. "성공입니다! 성공이라고요!"
국내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명필'(名筆)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국내에서도 사무자동화의 기반이 되는 '워드프로세서'가 우리 기술로 선보인 것이다. 이기식 박사가 워드프로세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일본 유학 시절. 일본 정부 초청으로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동경공업대학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그는 동료 학생들이 '워드프로세서'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신기하기만 했다. 일본에서는 워드프로세서 도입이 시작되고 있었고, 미국에선 널리 사용되던 시절이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선 손으로 직접 적거나 타자기를 사용하는 것 외에는 문서를 만들고 편집할 방법이 없었다.
명필은 도스(DOS) 기반에서 컴퓨터를 부팅한 후 검은색 화면에 '명필'이라고 입력을 하면 사용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명필을 처음 사용한 곳은 청와대라고 한다. 1980년대 들어 국가정보화에 관심이 많던 정부는 청와대부터 일선 관공서까지 업무용 컴퓨터에 '워드프로세서'를 설치했다. 이기식 박사는 "명필은 문서작업 공간을 타자기에서 컴퓨터로 옮기는 '사무자동화'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이후 1980년대 말 한글과컴퓨터가 '아래아한글 1.0'이라는 워드프로세서 제품을 내놓았고, 삼성전자도 '훈민정음'이라는 제품을 선보였다. 지금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사무용 프로그램 '워드(Word)'를 많이 사용하지만 국산제품인 '한글' '훈민정음'도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어 문서편집에 표·수식을 처리하고 발표용 자료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엑셀' '파워포인트' 등이 널리 보급되면서 사무자동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