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상 신부(춘천교구 인제본당 주임)
스페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사진을 정리하다가 길가 집 벽에 그려진 그림을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그 사진은 어느 늙고 약한 노인이 다리미, 침대, TV 등 많은 짐으로 가득한 배낭을 메고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이다. 그 노인 머릿속에 안락한 의자에 앉아있는 편안함을 상상하면서 힘든 길을 걷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접하면서 현재 내 삶을 다시 보게 된다. 사제 인사이동이 있을 때면 늘 걱정이 앞선다. 또 이 많은 짐을 어떻게 옮길까? 내가 부임하는 본당 신자들이 뭐라고 할까?
내 짐 속에는 옛날 막국수 틀과 떡을 치는 떡판과 떡메가 있다. 공구들은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을 만큼이 있다. 산골 작은 본당 주임으로 있을 때, 기계화로 버림 받은 막국수 기계를 구입했다. 아마도 그때는 이것을 통해 큰 명절에는 시골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함께 어울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옛날 막국수 틀에서 막국수를 누르려면 적어도 장정 네 사람이 있어야 겨우 되기에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에 부임한 본당에서 "우리 이번 명절에는 윷을 치면서 막국수를 누룹시다"라고 했더니, "신부님, 밖에 나가면 사천 원이면 되는데 왜 그리 힘들게 하십니까?"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럼 찰떡이라도…" "방앗간에 가면 빠른 시간에 정확하게 만들어 주는데…"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아 그러한 추억이 있었기에 모두에게 농촌의 마음을 알려주고 싶었고, 함께 어울리는 삶을 나눠 본당 공동체가 더 활기 있게 되고, 또 잘 어울려지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 본당이나 처음 부임을 하면 나는 먼저 예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장독대를 점검한다. 본당 장맛을 보기 위해서다. 옛 어른들은 "그 집 장맛을 보면 그 집 내력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본당의 장을 맛볼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요즘 필요한 만큼 잘 포장돼 입맛에 맞는 제품을 고르면 되는 세상이니까.
지난해 쥐눈이콩을 심어 성모회에 주었다. 무언의 압력을 넣은 것이다. 덕분에 지난달에는 함께 고추장과 막장을 가득 담았다. 올 한해는 아무 걱정없이 살 수 있는 것 같은 뿌듯함의 미소가 지어졌다. 아울러 욕심이 생겼다. 올해 콩 농사는 모두 메주를 만들어 교구 모든 본당에 팔아야 겠다는….
카미노 길 벽화를 통해 만난 노인은 더 이상 외국인이 아니라, 내 자신임을 반성하면서도 오늘도 막국수 틀과 떡판을 칠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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