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일기

양을 잘 치게

namsarang 2010. 5. 17. 22:14

[사목일기]

 

양을 잘 치게


                                                                                                                                                          김길상 신부(춘천교구 인제본당 주임)


   며칠 전 첫 주임으로 사목하던 본당에서 새 성전 축복식 초대장을 받았다. 초대장을 받고 그때 일들이 새롭게 떠올랐다.

 첫 주임신부로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많은 추억을 쌓은 곳이기에 감회가 새롭다. 14년 전 보좌생활을 마치고 첫 본당 주임 소임을 받았다. 주교님께서는 걱정이 되셨는지 나를 부르셔 당부하셨다.

 "김 신부님. 이제 본당을 나가게 됐는데, 그곳은 아주 작은 공동체라네. 여태껏 공소생활을 해 어려움이 많은 곳이지만, 자네가 그 양들을 잘 치며 생활하기 바라네."

 본당주임이 된다는 기쁨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빨리 본당에 부임을 했다. 물론 첫 주일에 본당 승격 미사도 준비해야 하기에, 빨리 가서 신자 분들과 의논해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본당에 도착하니 신자 다섯 분이 환영 나왔다. 그런데 신자 분들보다 더 많은 환영 인사(?)들이 있었는데….

 "메에-에-"

 바로 양들이었다. 그들은 신자 분들보다 더 큰 소리로 나를 환영했다. 이 양들은 전임 주교님께서 치시던 것으로 주교님이 바뀌시고, 양 치던 곳이 다른 용도로 바뀌자 이 산골 공소로 보내진 것들이었다. 모두 열 마리가 넘었다.

 "양을 잘 치시게"하는 주교님 말씀이 떠올랐고, 어떻게 하면 이 양들을 잘 칠 것인가(?) 고민했다.

 승격미사를 무사히 마치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사순시기가 다가왔다. 사순시기가 끝나고 첫 부활 기쁨을 나눠야 하는데 공소에서 승격된 지 얼마 되지 않고, 신자도 많지 않아 부활잔치 비용이 없었다. 그때 본당 큰 밭에 뛰노는 양들을 바라보며 주교님 말씀을 떠올렸다.

 "양을 잘 치게나."

 신자들에게 주교님 명(?)을 전해드리고, 양이 놀던 밭을 개간해 농사를 짓겠다는 계획도 전했다. 그리고 파스카 잔치에 그 양들을 잡아 이웃 본당에 강매를 해 잔치비용을 마련했다.

 그해 주교님이 사목방문 중에 물으셨다.

 "김 신부님, 양들은 모두 어디로 보냈나?"

 "예 주교님 말씀대로 치워 본당 부활잔치에 잘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순간 주교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내가 양을 치라고 했던 것은 진짜 양 목을 치라는 것이 아니었네."
 
 "주교님 죄송합니다. 말씀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본당을 운영하기 위해, 농사를 지으려 양들을 치웠던 것입니다."
 덕분에 나는 양 치는 목동이 아니라, 농사짓는 농군의 일이 시작돼 오늘에 이르렀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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