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사건 일어난 지 27년 묘소의 건물은 사라지고 시멘트 기념탑만 새로 섰다 남북 어디든 가기 싫다던 테러범은 25년 옥살이하다 암으로 숨졌다… 공중폭파된 KAL 858機가 수장된 안다만海는 北무기화물선만 오갈 뿐이다"
주(駐)미얀마 한국 대사관 사무실 서가에 있는 해묵은 자료를 정리하다가 '아웅산암살폭발사건 판결문'이라는 책자를 보았다. 1991년 4월 남북문제연구소가 발간한 것이었다. 1983년 북한 테러요원 3명이 미얀마(당시 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 사건에 대하여 미얀마 양곤 특별법원이 내린 판결문이었다. 미얀마어로 된 판결문 영인본과 한글 및 영어 번역본이 함께 실려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27년이 지난 지금 양곤에서 이 판결문을 읽어보는 기분이 착잡하다.- ▲ 조병제 주미얀마 대사
자료를 발간한 1991년은 사건이 일어난 지 8년이 지난 때라 사건의 엄중함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점이었다. 자료집의 서문은 '유가족의 슬픔을 위로하고 우리 세대가 통일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렀는지 후손에게 알리고자 함'이라고 발간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통일을 언급할 만도 했다. 1991년은 세계와 한반도 정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던 때다. 소련이 해체되고, 지구적 차원의 냉전 종식이 한반도에도 평화와 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가 부풀고 있었다. 남과 북은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하였다.
그로부터 다시 19년이 흘렀다. 그때의 기대는 성급했던 것으로 판명 나는 듯하다. 북한 핵 문제라는 돌발 변수도 생겨났다. 2000년과 2004년 두 번에 걸친 남북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가르는 냉기류는 가시지 않고 있다. 남과 북의 거리는 이처럼 멀기만 한 것인가. 천안함 폭침으로 온 나라가 침통하다는 소식이 여기에도 전해진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북 테러요원 3명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다. 한 명은 범행 직후 도망가다 사살되었다. 체포된 두 명은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한 명은 이듬해 사형이 집행되었고 다른 한 명(강민철)은 범행을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한 정상이 참작되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강민철은 양곤 인근에 영국 식민당국이 지은 '인세인' 감옥에서 외국인으로선 최장기 복역을 하였고 2008년 5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인은 간암이었다.
테러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남의 나라 감옥에서 25년을 보내는 동안 강민철이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남겨진 기록은 거의 없다. 강씨가 죽기 한 두 해 전 우리 국회에서 강씨 송환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으나 진전은 없었다. 다만 2007년 미얀마와 북한이 외교관계를 재개할 무렵, 강씨 이야기가 잠깐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미얀마 망명신문 '이라와디'가 수감 동료의 말을 인용하여 강씨가 "남·북 어느 곳으로도 가기 싫다"고 말한 것이 국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강씨는 북한으로 돌아가면 배신자로 취급될 것이고, 한국으로 가면 법정에 회부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강민철은 화장되었고 묘지는 없다.
양곤강(江)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안다만해(海)다. 아웅산테러 5년 뒤인 1987년 바그다드를 출발하여 서울로 가던 KAL 858기가 또다시 북한 테러로 공중 폭파되고 탑승했던 승객과 승무원 등 115명이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된 바로 그 바다다. 그곳에도 그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을 말해주는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작년 6월 북한 화물선 강남호가 무기를 싣고 있다는 혐의를 지고 안다만 해역으로 오다가 결국 북한으로 돌아갔다거나, 올해 3월 역시 북한의 청진호가 안다만 해역을 통과하여 양곤강 하구 '띨라와' 항구에 무기를 하역하였다는 언론 보도들이 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