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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순이' 할머니

namsarang 2010. 6. 24. 21:33

[만물상]

'금순이' 할머니

'눈바람을 무릅쓰고 얼음판 위에서 밤을 새운 군중들은 배가 부두에 와 닿는 것을 보자 갑자기 이성을 잃은 것처럼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곤두박질을 하듯 부두 위로 쏟아져 나갔다.' 소설가 김동리의 단편 '흥남철수'의 한 대목이다. 그는 1950년 12월 15일 시작된 흥남철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해, 일단 혼란이 멎었으나 그와 동시, 이번에는 또 그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가려는 듯했다.'

▶압록강까지 북진(北進)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30만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해야 했다. LST 수송선 등 모두 200척이 열흘 동안 국군·유엔군 10만5000명, 피란민 9만1000명을 탈출시켰다.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피란민 1만4000명을 빽빽이 싣고 거제도까지 왔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현인이 부른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는 생이별의 아픔을 겪은 실향민의 마음을 담았다. 뿔뿔이 흩어지면서도 서로가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소리쳤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는 노랫말이 그래서 나왔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다시 만나자는 희망을 노래해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힘을 줬다. '금순이'는 이때 억세고 강인한 삶의 의지를 지닌 한국 여성의 대명사가 됐다. 실제 배를 타고 거제도에 도착한 '금순이'들은 미군 빨래를 하거나 포로수용소에서 막일로 가족을 먹여살리기도 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엊그제 1·4후퇴 때 월남한 '금순이'란 이름의 할머니 12명을 초청해 잔칫상을 올렸다. 박물관측은 "전쟁을 딛고 꿋꿋하게 살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금순이 누님, 어머님, 할머님께 감사하자는 취지"라고 했다. 함흥 출신인 한금순(77)씨는 "노래 가사처럼 굳게 마음먹고 살았어. 전쟁과 공산당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라며 "이만큼 살게 해준 대한민국에 감사해요"라고 했다. 금순이는 전후의 폐허에서 누이로, 아내로, 엄마로 살면서 묵묵히 대한민국 성장에 내조(內助)해온 한국 여성의 초상화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