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같은 사실은 평양 주재 헝가리 대사관이 6·25 당시 본국과 주고받은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대(大)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지영(44)씨는 지난 2007년 헝가리 외교문서보관소에서 평양 주재 헝가리 대사관이 1950~1989년 본국과 주고받은 외교문서 5만700여쪽을 입수, 6·25전쟁 시기를 먼저 번역했다.
- ▲ 6·25 전쟁 기간 중 평양 주재 헝가리 대사관이 본국과 주고받은 외교문서를 입수, 연구해 온 김지영(44) 박사가 당시 문서를 들고 6·25 전쟁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평양 주재 시미치 샨도르 공사는 1950년 7월 10일 본국에 "6월 25일 일요일 아침 남한 이승만 군대가 북한 국경수비대를 공격했다. 북한군은 이들을 퇴치하고 남쪽으로 20㎞쯤 밀고 내려갔다. 북한 정부와 인민은 이 전쟁이 매국노 이승만 괴뢰 정권과 미국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다"는 전문을 보냈다.
외교문서는 1950년 미군 폭격과 피란 상황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7월 20일 정오부터 평양 상공에 5대의 B-29폭격기가 나타나 공항과 격납고를 융단폭격했다. 낮에는 이동이 불가능하고 대사관도 지하벙커를 만들어 대피하고 있다"고 전했다.
헝가리 대사관은 10월 2일 오후 3시 "남한 군대의 북진 때문에 대피해야 한다"는 북한 외무성의 통보에 따라 8일 다른 대사관과 함께 평양을 떠났다. 9일 북·중 국경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 도착했지만 "11월 1일 북한 외무성이 '적들이 14㎞ 떨어진 곳까지 왔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야 한다'고 알려와 같은 날 만주로 갔다"고 밝혔다. 이들은 11월 8일 북한으로 돌아왔으나 곧바로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겨울이고 지난번 평양에서 나올 때 너무 고생을 했다"는 게 이유였다. 헝가리 대사관은 1951년 6월 10일 새벽 평양으로 돌아와 "북한 정부청사에서 북쪽으로 20㎞ 떨어진 산속 계곡에 대사관 위치를 정했다. 미군 폭격을 피하기 쉬운 곳"이라고 타전했다. 반면 소련·중국 대사관은 1951년 1월 북한 정부와 함께 남쪽으로 움직였다.
헝가리 외교부는 "1951년 11월 23일 북한 고아 200명이 4명의 보모와 함께 부다페스트 서부역에 도착했다"는 전문을 평양 주재 대사관에 보냈다. 고아들은 부다페스트 인근 학교에서 머물게 된다고 덧붙였다.
헝가리는 1948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1989년 우리와 수교한 이후 평양 주재 대사관을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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