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한반도를 초토화시켰다. 개인의 재산은 물론이고 미미한 수준에 있었던 국가 기간산업시설과 공공시설이 대부분 파괴됐다. 재산 손실 추정액은 320억달러에 달했다. 또 320만명의 피란민과 30만명의 미망인, 10만여명의 전쟁고아 등으로 우리의 사회적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전쟁은 휴전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 여파는 남·북한에 커다란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북한은 전쟁 중 많은 인명손실과 함께 주민들이 대거 월남해 인적자원 측면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북한체제에 반대했던 다수의 사람이 월남하게 됨에 따라 김일성 독재체제를 보다 쉽게 구축할 수 있었다.
남한은 전쟁 이전부터 시작된 북한 주민들의 대거 유입과 경제기반의 파괴로 많은 사람이 의식주를 해결하기에도 벅찼다. 1960년대까지 국가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것이었다.
국제적으로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5년 만에 발생한 준(準) 세계대전이었다. 자유진영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21개국이 전투부대와 의료지원단을 파병해 유엔의 이름으로 국군과 함께 싸웠고 공산진영에서도 중국이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했으며 소련 역시 공군과 군사고문단, 첨단무기 등을 지원했다.
6·25전쟁을 통해 각국의 이해관계는 크게 갈렸다. 미국은 6·25전쟁을 '아시아에서 미국을 시험해보기 위한 공산주의의 도전'이라고 보고 500억달러가 넘는 전비를 쏟아부었다. 비록 승패를 결정짓지 못했지만 자유진영의 리더역할을 수행했다. 소련은 전쟁의 배후조종자로 비난받았고, 중국은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아시아뿐 아니라 제3세계의 리더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대만은 6·25전쟁 덕분에 잠시 중국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시간을 벌게 됐고 미국의 보호 아래 자립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2차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경제 재건의 결정적 계기를 갖게 됐으며, 실제로 전쟁 기간 중 매년 10% 이상의 GNP 성장을 이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폐허가 됐던 유럽도 경제 회생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6·25전쟁 결과로 확고한 '냉전체제'가 구축되면서 세계 각국은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와 안정을 찾게 됐다. 이 전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도미노처럼 번져가던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