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게시판

백두산의 여름

namsarang 2010. 7. 21. 17:21

[아침논단]

백두산의 여름

  •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6월 백두산 기습 눈보라 우리 앞길 막는 중국 벽을 생각나게 해
안타까우나 지금은 中의 대북 영향력 막을 '천안함 이후' 생각할 때

6월 말 백두산을 다녀왔다. 평원의 무더위는 산 가까이 가자 씻은 듯 사라졌다. 진눈깨비가 흩뿌리는 산마루는 눈에 덮여 있었다. 기습적인 폭설은 천지 바로 밑까지 이어진 북파(北坡) 코스를 가는 지프 운행을 차단해 비룡폭포를 보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폭포에서 바라본 산세(山勢)의 장엄함은 반도 남쪽의 산과 사뭇 달랐다.

현지에서 창바이산(長白山)이라 불리는 백두산은 '중국 10대 절경'의 하나다. 지금도 중국인 관광객이 더 많지만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그런 추세가 가속화하고 있다. 우리가 민족의 영산이라 부르는 백두산은 대대적인 개발 열풍과 함께 완벽히 중국화하고 있는데 천지의 절반을 차지한 북한 관할구역은 접근불가의 동토(凍土)로 남아 있을 뿐이다.

눈보라가 백두산을 휩쓴 6월 말 유엔 안보리에는 천안함 사태가 상정되어 있었다. 국제합동조사단이 인증한 결정적 증거를 확보한 한국의 강공책은 속절없이 중국의 벽에 막혔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력도 G2 중국의 버티기 앞에 역부족을 실감했다. 예정되어 있던 서해에서의 한·미 합동훈련을 동해로 바꿀 정도로 중국의 반발은 강력한 것이었다.

천안함 폭침은 한민족에게 운명에 가까운 한반도의 지정학과 지경학(地經學)을 새삼 일깨운다. 이천년이 넘는 역사 동안 우리가 중국보다 잘살았던 건 지난 수십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한 기간인 것이다. 일본과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20세기를 제외하면 한반도는 유사 이래 중국 대륙의 압도적 영향력을 피할 수 없었다. 20세기에조차 중국은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둔 6·25전쟁의 결정적 순간을 좌초시킨다. 중국의 수·당 제국과 감연히 일합을 겨룬 고구려를 한국 민중이 그리워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천지에 올라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싶어 하는 마음 한쪽에 역사적 보상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천안함 피격과 관련해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발언을 우리는 '중국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복잡한 현안에 대해 직설(直說)하지 않고 은유하면서도 할 말 다 하는 중국인의 대륙적 유장함 앞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자는 지기 마련이다. 미국과 세계쟁패를 다투는 대국 중국의 굴기는 특히 중국이 배타적 이해관계를 자임하는 동아시아와 한반도에 긴 그늘을 드리운다.

천안함 사태를 둘러싼 유엔 안보리의 각축은 정의가 실현되기는커녕 제도화한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국제질서의 현실을 반영한다. 힘센 놈이 대장 노릇 하는 것이다. 천안함 침몰이 '공격'에 의한 것임을 '개탄'하면서도 공격 주체를 북한으로 특정하지 않은 안보리 의장성명은 미·중의 타협책임과 동시에 한반도 현상유지에 대한 중국의 결의를 입증한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가. 결국 중국은 북한의 붕괴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국가의지를 재확인한 셈이다. 미군이 압록강까지 진군하느니 차라리 핵무장한 북한을 용인하는 게 중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는 '김정일 이후의 시대'조차 북한체제의 괴멸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온 박한식 조지아대 석좌교수는 북이 천안함 출구전략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남아돌아가 동물사료로 쓸까 고민하는 남녘의 쌀을 굶주리는 북녘 동포에 주지 않는 건 "천벌받을 일"이라는 말과 함께였다. 대북지원을 중단한 한국 정부의 단견에 비하자면, 북을 공포와 기아의 땅으로 만든 체제와 그 지도자가 천 배는 더 천벌받을 존재일 것이다. 이렇게 균형 감각을 결여한 사람이 세계 유수의 '북한 전문가'라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북한 붕괴론의 신화에서 벗어나 김정일 정권의 존속과 포스트 김정일 체제의 대두라는 엄연한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반도를 강타한 천안함 폭침사태도 남북관계의 틀을 바꾸지 못한다. 구조적 교착 상태에 놓인 한반도 상황을 단칼에 푸는 파천황(破天荒)의 해법은 없다. 핵문제를 포함한 북한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다만 관리될 수 있을 뿐이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급증하는 중국의 대북 영향력을 제어하는 천안함 출구전략을 모색할 때다. 백두산의 6월을 급습한 눈보라조차 성큼성큼 다가온 여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