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르웨이 입양아의 슬픔
군의관이었던 아버지와 미혼모였던 어머니… 그가 입양되던 해에 生母는 세상을 버렸다
30년간 궁금했던 '출생의 비밀' 알게 됐지만 生父는 "너무 부끄럽고 미안…" 만남 피해
"에스, 이, 오…. 서(SEO)…."난생처음 생모(生母) 이름을 불러보던 남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름 석 자를 다 부르기도 전이었다. 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홀트아동복지회 사무실에서 크누트 에길 바이안(33·한국명 박재일)씨가 30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 이름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1980년 11월, 세 살 때 노르웨이로 입양된 박씨가 지난 15일 모국(母國)을 찾았다. 박씨는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마련한 해외 입양아 모국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해 한국땅을 밟았다. 이 행사는 세계 각국으로 입양된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해 1992년부터 매년 진행되고 있다. 올해는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등 7개국에 입양됐던 20명이 한국에 왔다.
- ▲ 지난 23일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한 어린이집에서 세 살 때 노르웨이에 입양돼 30년 만에 고국을 찾은 박재일(사진 맨 왼쪽)씨가 빛바랜 어린이집 앨범을 넘겨보고 있다. 1980년 11월 입양되기 전 6개월 동안 이곳에서 지냈던 박씨는 “그동안 늘 한국을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박씨는 현재 오슬로에서 여론조사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그동안 늘 한국을 생각해왔다"며 "생부모를 꼭 만나보고 싶어 왔다"고 했다. 보통 해외 입양아가 20~30대가 되고 생활이 안정되면 정체성을 찾기 위해 연어처럼 모국을 찾는다고 한다.
이은정(38) 사회복지사가 박씨 앞에 누런 파일을 하나 꺼내 들었다. 1980년 5월 박씨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홀트 복지회에 처음 왔을 때 작성된 개인신상 카드다. 빛바랜 종이에 30년 전 박씨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빵과 우유를 좋아하던 식성, 옆으로 누워 잠을 자는 습관, 오른쪽 허벅지에 있는 2㎝ 크기의 점 등 박씨의 발달 사항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씨는 한국어를 모르는 박씨에게 영어로 신상카드 내용을 설명해줬다. 99㎝ 키에 15㎏이던 세 살 당시 흑백사진을 쓰다듬으며 박씨가 또 한 번 눈물을 글썽였다.
"크누트의 어머니는 키가 167㎝였어요. 당시엔 매우 큰 키였지요. 아버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의사로 재직하고 계시네요."
이씨의 말을 듣던 박씨의 뺨에는 굵은 눈물이 흘렀다. 그는 이날 어머니 이름과 아버지 직업 등 30년 동안 품어왔던 궁금증을 한꺼번에 풀었다. 서류를 넘기던 이씨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박씨 모친의 사망진단서였다.
"…돌아가셨나요?" 박씨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씨가 "크누트가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힘들게 대답했다.
박씨가 노르웨이로 입양되던 1980년, 박씨 모친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박씨 모친은 군의관 사이에 낳은 박씨를 미혼모 신분으로 남몰래 3년간 키우다가 박씨 아버지를 찾았다. 이씨는 "3년 동안 크누트를 혼자 키운 어머니도 힘드셨을 것이고, 당시 3년 만에 아들의 존재를 알게 된 아버지도 당황했을 것"이라고 입을 뗐다. 박씨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에 의해 홀트에 맡겨졌고, 노르웨이로 입양됐다.
이번에 홀트측의 연락을 받은 아버지는 "평생 잊지 못할 첫 아이지만 난 30년 전 아버지 권리를 이미 버린 사람이다. 이제 와서 아버지라고 나타나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러워 죄송하다"며 아들 앞에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박씨는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견디기가 힘드네요. '그동안 잘 지냈느냐', '항상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라는 부모의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는데…."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박씨는 이날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한 어린이집을 찾았다. 30년 전 홀트 복지회에 맡겨졌던 그가 입양되기 전 6개월 동안 위탁됐던 곳이었다. 1954년 고아원으로 시작된 어린이집은 지금까지 줄곧 이곳에 있었다. 1980년대 당시 어린이집 흑백 사진 앨범을 넘겨보던 박씨가 갑자기 사진 한 장을 가리키더니 "여기 이 문이 기억나는 것 같다"며 눈물을 훔쳤다. 1978년부터 이곳에서 근무했다는 김관태(66) 원장이 박씨를 다독였다. 서로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은 1980년 그해 6개월간 같은 공간 아래 있었다.
"3년간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를 만나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지금 여기에 없네요. 아버지에게 그동안 내 삶에 대해 편지를 쓸 겁니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게 (아버지에게) 사진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박씨는 노르웨이 양부모와 함께 모국을 다시 찾아, 자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어린이집을 꼭 다시 찾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이번 모국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한 입양아 20명 가운데 친부모를 만날 수 있었던 이들은 7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