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참고

光化門 편액

namsarang 2010. 8. 16. 23:05

[만물상]

光化門 편액

 

우리가 흔히 '광화문 현판'이라고 부를 때의 '현판(懸板)'은 '편액(扁額)'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현판은 나무 판에 글씨를 써 건물에 내건 각종 시문(詩文)을 모두 포함하므로 범위가 매우 넓다. 편액은 건물마다 딱 하나뿐이다. 편(扁)은 글씨를 쓴다는 뜻이고 액(額)은 '건물 앞부분 높은 곳', 사람으로 치면 이마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조가 세운 위나라 명제(明帝) 때 일이다. 대궐에 능운전(陵雲殿)이 완공돼 편액을 걸어야 했는데 대목수가 실수로 글씨도 쓰지 않은 나무판을 건물에 못으로 박아버렸다. 당대 최고 명필 위탄(韋誕)이 글씨를 쓰게 됐다. "위나라 보물이나 그릇에 글씨를 쓰는 건 모두 그의 몫"이라 할 정도로 이름 높은 위탄이었다. 그러나 땅에서 25척 높이에 줄을 타고 올라가 매달려 세 글자를 쓰고 내려와 보니 머리털이 모두 희어버렸다.

▶진나라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王獻之)도 글씨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이었다. 대궐에 태극전을 짓고 편액을 쓰는 일이 왕헌지에게 떨어졌으나 그는 위탄이 겪은 일을 얘기하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아무리 글씨에 능한 대가도 큰 글자 쓰는 것과 작은 글자 쓰는 것은 다르다. 가로 세로 1m 넘는 글자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하면서 전체가 살아 움직이도록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 고대엔 8가지 서체 중 편액을 쓰는 글씨체가 따로 있었다. 베이징엔 '편액 박물관'이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는 잦은 외세 침략과 전쟁, 화재로 오래된 편액이 많지 않다.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편액이 신라 명필 김생,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편액이 고려 공민왕 글씨로 전한다.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을 비롯한 조선시대 궁궐 전각의 편액은 일제와 6·25 전쟁 때 많이 망가지거나 사라졌다. 국보 1호 숭례문 편액은 2년 전 방화로 심하게 부서졌다.

▶경복궁 정문 광화문이 복원되면서 새로운 편액이 어제 광복절 65주년에 때맞춰 공개됐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편액을 그대로 두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결국 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건(重建) 책임자 임태영이 썼다는 글씨로 돌아갔다. 조선왕조가 망한 지 100년 되는 해 조선의 정궁(正宮) 얼굴이 원래 모습을 찾았다. 나라가 망하면 가장 비참한 신세가 되는 게 문화재다. 광화문 편액을 다시는 새로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