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거쾨더(Siger Köder 1925.1.3~ )
그는 1925년 1월 3일 독일 남서부의 슈바벤 바서랄핑엔(schwaben wasseralfingen) 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성당의 봉사자로 재무쪽의 일을 담당하였다고 하는 점과, 그가 태어난 곳이 독일 남서부의 신앙이 깊은곳으로 유명한 고장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아주 신앙이 강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을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것 같지는 않다.
1946년 귀금속 공예 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는 우선 예술가로서의 길을 먼저 택한다. 그 시절의 경험이 후에 그의 작품세계에 간간히 보이는 금속 조형물을 가능하게 하였을것이다. 1947년 부터 1951년 까지 슈트가르트(stuttgart)의 예술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하였다. 다시 1951년 부터 1952년까지 영문학을 공부하였고, 그리고 바로 이어서 교육자로 재직하였다
그가 40세가 되던 1965년 부터 튀빙겐(tubingen) 과 뮌헨(munchen) 대학에서 카톨릭 신학을 공부하였고 1971년 사제 서품을 받을때 그는 이미 46살 이었다.
4년 동안의 보좌 신부 생활을 마친뒤 Ostalbkreis로 발령을 받아 화가로서 그리고 본당신부로서 봉사하며 살다가 1995년 은퇴하였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이 지역의 성당을 비롯한 공공장소에 소장되어있고 요즈음도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인쇄물이 아닌 진품 그림을 보기 위하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지거 쾨더는 그의 그림을 삽화로 엮어 만든 성서와 수많은 출판물들, 그리고 1996년 미세레오르(misereor) 가 "버려진 사람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주제로 추진했던 단식운동에서 Hungertuch를 제작한 화가 신부로 잘 알려져있다.
심지어는 대륙을 건너 미국에서 출판되는 종교서적에도 빈번히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는 예술가이며 교육자, 그리고 신학자이며 성직자로써 그 모든 능력을 한 몸에 가지는 행운을 가졌고 늘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살며 하느님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강론을 하고있다.
약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미술을 전공한 후에 신학을 공부했기에 그림을 통해 풍부한 묵상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SK라는 사인이 붙은 그의 작품은 슈바벤 고향의 교회에서 비롯하여 로마 근교에있는 산 파스토레(San Pastore) 교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화 및 세속적인 작품들에서 나타납니다.
1995년 미세레오르(Misereor)를 위해 만든 단식포(斷食布)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지거 쾨더는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유명한 '종교적'인 화가들에 속합니다.
'성서'에 대한 삽화, 제단화, 십자가의 길 그림, 교회나 기타 건물들에 있는 유리화 등 다방면에 걸쳐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창조성은 1950년대 초부터 수많은 전시회나 출판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성화들은 성서의 내용에서 핵심적인 요소를 끄집어내고 있으며, 많은 작품에서 관람자가 주체로서 참여하게 초대하고 있습니다.
★ 지거 쾨더 신부님 약력
1925.1.3. 독일 바서랄핑엔(Wasseralfingen) 출생.
1931-1935 바서랄핑엔 초등학교
1935-1943 엘방엔/야그스트(Ellwangen/Jagst) 김나지움
1943-1945 근로봉사대 근무,병역근무, 전쟁포로
1946-1947 슈바벤 그뮌트(Schw bisch Gm nd)국립 귀금속 전문대학에서 금속세공,은세공 전공
1947-1951 슈투트가르트 예술 아카데미에서 스케치, 작품 분 류, 그림, 예술사 전공
1951-1952 튀빙겐 대학에서 영어영문학 전공
1953 슈투트가르트에서 예비교사 근무
1954-1965 알렌(Aalen)의 슈바르트(Schubart)김나지움에서 미술교사로 근무
1965-1970 튀빙겐 대학, 뮌헨 대학에서 가톨릭 신학공부
1971 로텐부르크(Rottenburg) 신학교 졸업 1971 사제서품
1971-1975 울름 교구 성 마리아 수소(St. Maria Suso) 교회 보좌신부
1975-1995 호엔베르크(Hohenberg), 로젠베르크(Rosenberg) 교회 주임신부
1995 은퇴 후 엘방엔에서 살고 있음 지거 쾨더는 독일 출신의 신부이며 화가입니다.
★ 십자가의 길 성화와 14처 기도
제 14처 예수, 무덤에 묻히시다. 주님! '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때문에 또 복음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라는 당신 말씀을 굳게 믿도록 도와 주십시오.
★ 그외 성화
그날 밤, 제자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음성이 그들을 불렀다. |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보아라!" 그들은 그의 말이 힘을 지니고 있음 뒤늦게 깨달았 |
다.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던 것이다. 요한만은 그 음성의 |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이 지닌 힘의 증명은 이 그림을 말해주는 틀에 불과하다. |
지거 쾨더는 제자들이 밝고 불그스름한 빛 속, 마치 모세가 타지 않는 불떨기 나무 앞 |
에서 한 경험을 그리고 있다. 그 빛이 제자들에게 닿는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 |
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 배에서 내린다. 그가 바로 베드로이다. 그는 빛이 반 |
사되고 있는 곳에서 마치 홀린 것처럼 멈춰 서 있다. 불 위에 올려진 물고기와 모든 |
사람들을 위한 빵은 식사의 초대이다. 이것은 부활사화 중 하나로, 상징을 해석함으 |
로써 겨우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그를 보았고, 그와 함께 식사했습니다." |
엠마우스(제대화), 유화,로젠베르크(독일)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 |
지 않았다." 그림에서 성서가 펼쳐져 있다. 성서의 뜻을 엠마오로 가는 여정 중에 함께 |
했던 부활하신 예수께서 깨닫게 해 주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는 성서에 |
나타나는 메시아의 고난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
플라톤의 글을 성서 두루말이와 함께 놓고 있다. 탁자에 아직 빵이 있고, 그 자리에 |
예수님을 위한 포도주잔도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이와 동시에 예수님은 |
그들에게서 벗어난다. 빵은 그에게 있어서 계속 영원한 생명의 저당물이다. 다른 제 |
자는 포도주잔을 잡고 축복하기 위해 손을 쳐든다. 몸짓과 표징은 예수의 최후만찬과 |
주일의 성찬식을 가리킨다. 잔 속의 포도주는 예수의 피이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 |
흘리는 계약의 피이다(마르 14,24). 이것이 엠마오이다. 더듬고 구하고 길을 묻는 것 |
으로, 만남을 위해 열려있고, 새로운 것을 위해 열려있으며, 생명이 죽음에서 나온다 |
죄인들과의 식사, 벽화, 산 파스토레(로마근교)
로마의 독일어권 학생들을 위한 예비 교육기관인 산 파스토레(San Pastore) 건물의 |
식당 전면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이곳은 속하는 영지(領地)이다. 학생과 손님들의 |
식사시간 때마다 이 그림은 무시할 수 없는 도전이 된다. 식탁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 |
은 오른쪽부터 제3세계의 사람·상류층 숙녀·대학생·어릿광대·눈먼 노파·창녀·랍비이다. |
그리고 뒷벽의 그림은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이다.
|
성령강림, 유화
바벨탑의 뼈대 속에 있는 인간들은 개인들로 남아있다. 그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기 |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 또한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다. 위로부터 밝게 비추는 |
붉은 색이 다른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건물인 교회이다. 문이 열리고 베드로 |
가 복음서를 들고 나온다. 이것은 복음선포의 의미이다. 그의 뒤, 집안에는 마리아 주 |
위에 모여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불 혀의 형태로 내려오는 모습을 살펴 |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령강림의 사건이 지속적으로 우리 가운데에서 일어나고 있다. |
즉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주교, 교황 요한 23세 |
와 같은 예언자적인 형태로 구현되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성령강림은 성령강림이 |
아닐 것이다. 그 위층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 한 청년은 |
그리스도의 깃발을 흔들고 있고, 가운데 남녀는 "땅에 평화"라는 글이 적힌 현수막을 |
펼치고 있다. 미사 때의 복사는 교회에 있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그는 창 밖을 향해 |
분향을 하고 있다. |
너희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유화
이 작품은 예수께서 제시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왼쪽 아래에 펼쳐져 있는 검은 두 손에 |
서 예수님 십자가의 다섯 상처 가운데 하나인 못 자국의 상처를 볼 수가 있다. 시커먼 |
손바닥에 난 피 자국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쉽게 발견할 수 없다. 지거 쾨더는 이 작품 |
에서 성서의 여러 곳에 나타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함축 |
적으로 표현하였다. 마태오 복음 25,31-46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과 관련된 구절을 |
그림의 제목으로 하고 있다. |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유화
이 그림은 예수의 탄생 때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나타난다. 그림 중앙에 말씀 |
이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셨다"(요한 1,14)는 성서말씀이 펼쳐 |
져 있고, "그리고 우리들은(und wir)"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그리고 구유 아래쪽에 |
펼쳐진 채 놓여있는 이사야 예언서는 햇순이 자라 나오는 이새의 그루터기에 대한 |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 |
난다"(이사 11,1)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온갖 재앙을 넘어서서 생명을 창조하는 |
하느님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을 선언 |
하신다. 그것도 조건 없이, 철회할 수 없게 선언하시는 것이다. |
그레치오(Greccio)에서의 크리스마스, 유화
프란치스코는 1223년 그레치오에서 크리스마스를 구유로 기념했다. 벽 높이의 |
이 그림은 엘방엔 마리아 아동보육원의 프란치스코 소성당 뒷벽을 장식하고 있다. 성 |
프란치스코는 1223년 그레치오에서 베들레헴의 사건을 의미 있게 재현케 했었다. |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서 식어버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 새롭게 불타오르게 |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치 사제가 축성된 성체를 보여주는 동안 성 프란치스코가 |
자정미사에서 어린아이를 변모시키기 위해 높이 들어올리는 것 같은 모습으로 그렸 |
다. 그리하여 성체는 마치 그 어린아이와 융합되는 것처럼 일치하게 된다. 이것은 영 |
성체가 강생(육화)의 생생한 구현이라는 것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
호수 위의 폭풍, 유화
엄청난 폭풍이 닥쳤다.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다. 돛대가 부러졌으며, 노도 부러졌 |
다. 물을 퍼내기에는 양동이가 너무 작았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아무 것도 더는 소용 |
이 없었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배의 뒤쪽 |
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제자들은 폭풍과도 같은 말로 예수를 깨워야 한다고 생각 |
했다. 그림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
않습니까?" 그리고 물결이 가장 사납게 들이닥치는 중에서도 그 분은 이렇게 말할 것 |
이다.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억제할 길 없는 불안 가운 |
데서도, 폭풍우 속에서도 그분에게는 절대적 고요함이 있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
"나는 언제나 너희들 곁에 있다. 나를 믿어라." 배는 그림 모서리 아랫부분과 교차하고 |
, 우리도 그 배에 타고있다. 즉 우리의 배이다. 우리의 불안과 함께, 또 우리의 하느님 |
과 함께 하는 배이다. |
야곱 우물가의 여인, 유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 예수께서는 여인의 과거를 알고 |
있고, 그녀와 함께 우물가에서 가르침의 대화를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그녀를 진지하 |
게 대해주면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
믿게되었다. 지거 쾨더는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그녀는 깊은 우물 속을 들여 |
다보고 그곳에서 비치는 상을 보고 있다. 우물은 깊은 자아의 상징으로서, 놀라운 |
경험을 비춘다. 빛의 경계선 때문에 그녀와는 분리된 예수님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
차원을 제공한다. 시카르 출신의 여인을 원형의 열린 우물 입구에서 볼 수 있다. 위로 |
부터 빛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우물에서, 즉 그녀 내면에서 이루어진 자아발견에 대 |
한 보상이다. 이 상징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찾아야 할 사람 |
은 바로 주님이며, 우리가 아주 깊이 내면을 성찰한다면 그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 |
다. 그리고 이 만남의 신비를 통해 우리는 "생명의 물"을 길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 |
고 있다. |
베드로의 닭, 유화
우선 호엔베르크의 공동묘지 그림이 보이고, 낡은 성물 보관소가 보인다. |
벽의 그림 "사자(死者)의 춤"은 그 중에서도 특히 죽음의 손에 부러지는 시계의 추락하는 |
바늘을 보여준다. 죽음은 태양이 지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가 울고 |
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죄를 후회한다. 성목요일 밤에 있었던 일이다. |
기원(起源)과 완성
이 그림은 엘방엔 성령교회에 있는 유리화 중 첫 번째 그림과 여덟 번째 그림을 합성 |
한 것이다. 아래 부분에 있는 첫 번째 유리화에는 "기원"이라고 적혀 있다. 원자, 분자 |
구조에서 세포, 식물, 장미가 생겨나다가, 수십 억 년 후 진화의 정상에서 각 인간의 |
얼굴이 나타나게 된다. 인간은 아직 살아있지 않은 것의 잠에서 깨어난다. 샤르댕 |
(Teilhard de Chardin)의 신학에서 보면, 우리 세계의 물질은 점점 더 정신으로 변화 |
된다. 윗부분에 있는 여덟 번째 유리화는 "완성"이다. 최고 형태의 인간의 정신은 다른 |
정신과 교환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래서 다시 작은 장미들로 구성되는 장미 속에 |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묘사되어 있다. 그게 여자와 남자인지, 신부와 신랑인지, |
야훼와 그의 백성인지, 그리스도와 교회인지는 열려져 있다. 우리의 역사가 성령의 |
역사라면, 모든 시간의 끝에는 인간의 구상이 그 목표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
아브라함, 유화
창세 15,1-6의 성서말씀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자식도 미래도 없는 아브라함 |
에게 하느님은 약속하신다. "하늘을 쳐다보고 별을 세어보아라. 별을 셀 수 있는가?" |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믿었다 |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아브라함은 열려진 하느님의 약속을 받아들 |
였다. 헤브론의 밤은 아브라함의 삶에 있어서 "운명을 결정지은 시간"이었다. |
지거 쾨더는 가운데 보이는 가장 중요한 별과 함께 이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 별은 |
언젠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후손에게서 나타날(민수 24,17) 메시아(마태 2,2)이 |
다. "야곱에게서 나온 별"이 아브라함의 얼굴과 손에 빛을 던지고, 그의 녹색 옷에도 |
빛을 던지는데, 흡사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시는 생명의 숨결과 |
도 같다. |
야뽁에서 야곱의 싸움, 유화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창세 32,29). |
창세기 32,23은 "바로 그날 밤"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야곱이 형 에사오의 영역과 |
구분되는 국경인 야뽁 나루를 건너던 밤이다. 일찍이 야곱은 술수를 써서 형에게서 |
장자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는 타향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을 했고 재산 |
을 늘리게 되었다. 강을 건너던 밤에 야곱은 자신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강 건너로 |
옮기고, 혼자 뒤떨어져 있었다. 그때 그를 덮친 미지의 사람과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인 |
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싸운 상대가 하느님임을 알게 된다. 그가 질문하면서 바라보 |
는 어두운 얼굴은 복수자의 얼굴이 아니다. 그 얼굴은 깊은 눈으로 선함을 발산한다. |
손으로 단단히 붙잡지만 잔인하지는 않다. 그 손은 오히려 붙잡고 받쳐주는 것처럼 |
보인다. "나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 밤중의 |
싸움에서 야곱은 자신이 지금까지 전혀 하지 않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가 기도하게 |
된 것이다! 다음날 지평선에 동이 트는 것은 야곱의 삶이 새로 시작되는 것을 말해주 |
는 표징이다.
모세와 불떨기 나무, 유화, 작가소장, 독일 떨기에서 불꽃이 피어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다. 모세는 겸손의 표지로 신발을 벗고 두 손을 가린 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다. 이 작품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 앞에 있는 작은 인간의 모습을 강한 대비로 표현하였다. |
주님은 나의 목자
다윗 왕은 왕관 대신 유대인의 기도 수건을 두르고 있다. 축복 받은 하프 연주자이자 |
노래를 만드는 이 사람이 기도를 하고 시편 23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
"주님은 나의 목자시다." 다윗 왕은 커다란 곤경에 처해 있고, 악의 손길을 감지한다. |
그러나 그는 "하느님이 나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라는 말을 믿고 신뢰한다. "그 분은 |
나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네"(중앙). "그 분은 나를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네 |
"(위쪽). "그 분은 나의 갈망을 채워주시네"(빵과 포도주). "그 분은 나를 성실히 |
인도하시네"(손). "내가 음산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지라도"(폐허), "나는 어떤 재앙도 |
두렵지 않네. 당신이 내 곁에 계시기 때문이네"(장미). 다윗의 목자 모습이 이제 선한 |
목자 예수의 모습으로 넘어간다. 그의 얼굴이 손에 나타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확 |
신을 주는 지팡이"가 된다. 그리고 물고기, 빵, 포도주가 넉넉히 차려진 식탁은 엠마우 |
스와 호숫가의 부활절 식사를 상기시킨다. 진실로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쉬 |
울 것 없어라." |
엘리아, 유화
"그곳에서 그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앉았다"(1열왕 19). 엘리야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
체념한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다. 까마귀들이 그를 먹여 살리고, 그에게 빵과 고기를 |
날라다주고 있다. 어느 날 엘리야는 모든 게 헛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
"주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
못난 놈입니다." 엘리야는 야훼의 일을 변호할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 |
이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1열왕 19,10). 이 유혹은 그에게 과 |
도한 부담을 주고 더욱 그를 지치게 하였다. 이 그림은 엘리야가 겪는 자신과의 내면 |
적 투쟁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엘리야는 믿음의 근원으로 향하는 길로 되돌아갔다. |
이때 그는 다시 계약의 하느님을 만나고 봉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
벽을 뛰어넘기, 유화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면 어떤 담이라도 뛰어 넘을 수 있고, 나의 하느님께서 힘이 되 |
어주시면 못 넘을 담이 없사옵니다"(시편 18,29)의 말씀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
모든 인간의 삶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장애들을 벽으로 나타낸 것이다. |
견디기 어려운 운명의 충격, 요구할 수 없는 결단, 불안과 적대관계, 뿌리뽑을 수 없는 |
선입견, 나쁜 질병, 죽음 등이 담으로서 존재한다. 어른일 법한 기도하는 사람을 화가 |
가 악동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이것은 "너희들이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이라는 |
예수의 말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등불과 빛은 믿음에 대한 상징이고, 하느님을 나타 |
내는 표시이기도 하다. 복사는 양손으로 전례 때의 횃불을 꼭 붙들고 있다. 마치 세계 |
기록을 깨기 위해 높이뛰기를 하는 것 같다. 그는 하느님과 함께 벽 세 개를 뛰어넘는 |
데 성공한다. |
내가 잠든 새벽을 흔들어 깨우리라,유화
시편 57의 기도하는 사람은 "당신께 이 몸을 숨기렵니다"라고 말하고 비탄에 잠겨 |
"당신이 내 발 앞에 그물을 쳤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
붙잡혔다고 느낀다. "내 영혼아, 잠을 깨어라. 비파야 거문고야 잠을 깨어라."(이 그림에서는 만돌린이 보인다) 절망했던 인간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마음속을 볼 수 있게 |
해준다. 우리는 그가 이 그물들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스스로 무엇인가를 했음을 알 |
게 된다. 그는 기도 중에 용기를 갖게 되었다. "내 마음은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때 |
때로 자기 의지의 힘을 모으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맞서 싸우며, 최소한 기도할 필 |
요가 꼭 있다. 우리는 물론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서에 나오 |
는 이 무명의 남자처럼,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노래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 분께 |
감사하려고 해야 한다. |
장미를 든 어릿광대, 유화
지거 쾨더가 그렸던 광대, 어릿광대, 또는 익살꾼들의 경우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 | ||||||||||||||
모두 슬픈 얼굴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제 지거 쾨더는 결코 삶의 아름 | ||||||||||||||
다운 것들을 싫어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서커스 묘사나 다른 많은 작품 | ||||||||||||||
들에서 이 점을 보여주고 있다. 〈장미를 든 어릿광대〉는 1992년에 그렸다. 게다가 | ||||||||||||||
"지거 쾨더의 그림들이 담긴 성서"라는 대 작업과 더불어 이제는 더 이상 고통스런 | ||||||||||||||
표정을 띠지 않는다. 고통에 찬 표정은 확실히 우울한 표정으로 변화되었다.
어느 어릿광대의 매장, 유화
그가 우리 집 담밖에 서 있다, 유화
대성당, 유화
돌아온 탕자를 반기는 아버지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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