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의 반대
'군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세박(암브로시오, 1761~1828)은 한양 역관 집에서 태어났다.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직후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지만 가족들이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아내는 그의 신앙생활을 심하게 방해하면서 천주교를 욕하기까지 했다. 김세박은 할 수 없이 가족과 이별한 뒤,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쳐 주거나 교회 서적을 필사하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주문모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았다. 그는 가끔 산중에 들어가 살면서 신심을 함양하는 데 열중하곤 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김세박은 수색을 피할 길이 없음을 알고는 직접 안동 관아로 가서 천주교 신자라고 자백했다. 한 달 후 대구로 이송된 그는 이재행(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박사의(안드레아) 등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은 김세박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인근 주민들에게서 거둔 세금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는 음식을 전폐키로 작정하고 철저히 대재(大齋)를 지켰다. 함께 있던 교우들이 똑같이 하려 하자 그는 자살 행위라고 만류하고는 그제야 음식에 손을 댔다고 한다. 김세박은 형벌과 대재로 쇠약해진 탓에 옥중생활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28년 12월 3일(음력 10월 27일) 옥사했다. 그의 나이 67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