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와 종교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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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탁희성 화백 | 박경화가 대구 감영에서 승려와 교리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도항'이라는 관명(冠名)으로도 알려진 박경화(바오로, 1757~1827)는 충청도 홍주 양반 집안 태생으로 33살 쯤 천주교에 입교했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안드레아)가 아들이다.
박경화는 입교 얼마 후 박해로 체포됐는데 마음이 약해져 석방됐다. 하지만 이후 더욱 철저히 신자 본분을 지켜나갔고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 후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그는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고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려고 노력하는 등 모범을 보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해 간 그는 그해 4월 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체포됐다.
천주교 우두머리로 지목된 박경화는 다른 교우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늙은 몸을 추스르기보다 먼저 교우들을 격려하고 보살펴 주었다.
상주에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전혀 굽히지 않아 사형을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그는 관장 명령에 따라 승려와 토론을 벌였는데 설명에 막힘이 없어 관리들조차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새 감사 부임 후 다시 형벌을 받은 박경화는 노령에다 여러 차례 형벌로 몸을 더 지탱하지 못하고 선종했다.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 그의 나이 70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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