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식 신부(원주교구 횡성본당 주임)
어버이날인 8일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경기 용인시에서 지병을 앓던 60대 노부부가 자식에게 짐이 되는 걸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 숨졌습니다.
병수발을 해온 아들 부부에게 '미안하다. 고마웠다'는 유서를 남긴걸 보면 그 동안 삶이 편치 않았나 봅니다.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라니 노인들 불행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됩니다.
노인뿐 아니라 어린이들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5일 어린이날 어느 신문에 실린 글을 보니 우리나라 어린이들 행복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23곳 중 꼴찌였습니다. 그 꼴찌가 조금 뒤떨어진 꼴찌가 아니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꼴찌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행복하게 뛰어놀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마땅치 않습니다.
청소년들도 불행합니다. 그들은 갈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디를 가도 잔소리와 감독의 눈초리뿐 설 땅이 많지 않습니다. 공부를 가장 잘하는 학생들만 모아 놓은 최고 대학인 카이스트 학생들이 줄줄이 자살을 합니다. 하물며 공부를 못 하는 학생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인간적 관계를 포기하고 살인적 성적 경쟁에 내몰린 잘못된 교육의 결과일 것입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 배우지 못한 사람들,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 능력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갖지 못하고 힘이 없다고 무시당합니다. 그들이 편안히 거처할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많이 배운 사람들, 많이 가진 사람들, 힘이 있는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은 행복할까요? 그들은 어딜 가나 사랑받고 존경받고 대접받아 마음이 편할까요?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지상 최고 권력을 누렸던 전직 대통령도 불행의 극치인 자살을 선택했고 재벌, 시장, 군수, 잘 나가는 정치인, 청소년들 우상인 연예인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잘났건 못났건, 많이 가졌건 못 가졌건 편안한 곳에서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지만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는 그런 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이런 불행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 세상에는 편안히 있을 곳이 없어 불행하지만 하느님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니 정말로 큰 힘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많아도 행복하지 못하고, 아는 게 많아도 행복하지 못하고, 똑똑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집에만 가면 돈이 적어도, 아는 게 적어도, 똑똑하지 못해도 편안하게 거처할 곳이 많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 집에 거처할 곳이 많음을 여러 번 보여주셨습니다. 가진 것 많고 아는 것 많은, 똑똑하고 잘 난 사람들이나 예의바르고 신앙심 깊은 사람들만 예수님께 나아 간 것이 아닙니다. 가지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죄인이나 못난 사람, 남에게 피해나 주는 사람,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도 예수님께 나아가서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처럼 모든 사람에게 편히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가톨릭교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 집에 거처할 곳이 많음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이셨듯이, 가톨릭교회는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이는 교회, 모든 사람에게 편안히 있을 곳을 만들어주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사회에서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도 이곳에만 오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성당이어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가진 게 적고 아는 게 적고 힘이 없다고 무시당하지만 성당에 오면 존경받고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성당에 와서까지 상처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성당이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편안하게 설 자리가 없지만 성당에는 편안히 거처할 자리가 많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바로 그런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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