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식 신부(원주교구 횡성본당 주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순교할 당시 상황은 절박했습니다. 가정적으로 아버지는 이미 순교했고 어머니와 동생들은 문전걸식을 하며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죽지 않고 살아서 가족을 돌봐야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선교사 세 분과 200여 명 교우가 모두 순교한 직후라 어떻게 하든 살아남아서 교회를 되살려야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김대건 신부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겉으로 배교하는 척하면서 일단 목숨을 건진 후 가족들을 보살피고 쓰러져 가는 교회를 재건하자. 그리고 후에 거짓 배교를 했노라고 하자. 신부가 한 명도 없는 마당에 내가 순교하면 이 불쌍한 신자들은 어찌하랴. 차라리 나는 배교해서 지옥에 갈지라도 신자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사제가 할 일이지. 아마 하느님도 그러길 원하실 거야. 내가 죽으면 신자들은 누구한테 성사를 받고, 어디 가서 미사를 드릴 것인가. 신자들이 나 하나 믿고 그 어려움을 견뎌 내고 있는데 내가 죽을 수는 없지. 일단 살고 봐야 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나 하나 '배교'라는 희생을 해서 교회에 큰 도움이 된다면 그게 바로 신부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잠시 거짓으로 배교를 할까?"
김대건 신부님은 과연 죽음을 앞두고 이런 고민을 했을까요? 어떤 소설에서는 한 신부가 신자들을 구하기 위해 배교자가 됩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를 앞두고 했을 것 같은 모든 염려는 어디까지나 인간적 생각입니다. 일시적 배교가 하느님 뜻일 거라는 생각도, 교회와 신자들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도 모두 인간적 계산입니다.
결국 김대건 신부님은 인간적 생각을 따르지 않고 주님 뜻을 따랐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인간의 생각도 하느님 지혜를 넘어설 수 없다는 확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옳게 느껴져도 하느님 뜻을 저버릴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 뜻을 따라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 뜻을 따랐던 김대건 신부님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포함한 성직자들이 모조리 처형됐어도 주님의 교회는 뿌리 뽑히기는커녕 오히려 순교의 피가 밑거름이 돼 점점 더 번창하고 확장됐던 것입니다. 하느님 뜻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안나씨는 "내가 주일미사에 참례하려고 주일에 가게 문을 닫으면 손님이 떨어져 돈을 벌지 못할 거야. 새벽미사에 갈 수도 있지만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새벽에는 잠을 자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지. 그러니 당분간 주일 미사에 안 나가는 것은 가족을 위해서나 건강을 위해서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아마 하느님도 이해하실 거야. 아니 하느님 뜻일 수도 있어"하며 스스로를 정당화시킵니다.
바오로씨는 "직장을 소홀히 하고 성당에 나가는 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실 리가 없어. 주일에는 애들 데리고 유원지라도 다녀와야 부모 노릇을 하는 거지. 가족도 젖혀놓고 성당에 나가는 것을 하느님이 좋아하실 리 없어"하며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법인 셈이죠. 그러나 그런 신앙은 하느님을 믿는 참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하느님 뜻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겼습니다. 즉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 뜻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10,19)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셨듯이 김대건 신부님은 "내가 순교하면 신자들은 누가 돌보며 성직자는 누가 모셔 오나?"하며 걱정하지 않고 그냥 하느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 목숨 바쳐 순교할 기회는 없지만 김대건 신부님처럼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 뜻을 실천하면 우리도 제2의 순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용의 일부는 필자가 지은 책 「예수님 흉내내기」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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