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식 신부(원주교구 횡선본당 주임)
한 여인이 상점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계산대에 하느님이 서 계셨습니다. 여인은 깜짝 놀라 여쭈었습니다.
"아니 하느님, 여기서 뭘 하고 계셔요?"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팔려고 기다리고 있단다."
여인은 이왕이면 자기가 원하는 최고의 것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평화와 사랑, 행복과 지혜, 자유를 사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평화, 사랑, 행복, 지혜, 자유 같은 열매는 팔지 않고 그 씨앗을 팔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이 씨앗을 사가지고 가서 잘 가꾸면 그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많은 것을 청합니다. 때로는 노력 없이 좋은 결과만 청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청원을 완성된 결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씨앗의 형태로 우리 마음에 뿌려주십니다. 물고기를 청하면 물고기 잡을 그물을 주시고, 평화를 청하면 평화를 그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씨앗을 주십니다. 그 씨앗을 우리 마음 밭에 심어 싹을 틔우고 자라 꽃을 피워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복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었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말라버렸습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음 밭이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 같은 사람은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마음 밭이 옥토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 마음 밭에 씨를 뿌리십니다. 천둥, 번개와 벼락을 통해 죄인들에게 회개의 씨앗을 뿌리고, 고통 받는 이웃을 통해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시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세례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 등 성사를 받을 때 하느님은 당신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성경을 읽을 때도 당신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수도 없이 우리 마음 밭에 뿌려졌습니다.
우리 마음 밭이 좋은 땅이었다면 지금쯤 좋은 열매를 아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밭이 좋은 밭이라면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갈라 5,22)를 풍성하게 맺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제의 강론을 통해서도 우리 마음 밭에 씨를 뿌리십니다. 그런데 똑같은 강론을 들어도 신자들 반응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깊은 감동을 느끼고 생활 속에서 많은 열매를 맺지만, 어떤 신자들은 강론을 들으나마나 '소귀에 경 읽기', '굳세어라 금순아'입니다. '신부님이 뭐라고 강론을 하든 내 방식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사제를 통해 아주 좋은 씨앗을 뿌려주셔도 이런 신자들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똑같이 피정을 받고, 똑같은 강론을 듣고, 똑같이 기도를 하고, 똑같은 훈화를 들어도 열매를 맺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어떤 이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 내 마음 밭은 어떤 밭입니까?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에 덮인 밭입니까? 아니면 좋은 밭입니까? 하느님이 내 마음 밭에 평화의 씨앗을 뿌렸는데 평화롭지 못하면 그것은 분명 내 마음 밭이 돌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 밭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셨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분명 마음 밭이 가시덤불로 덮여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생활 속의 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뿌려질 하느님 말씀의 씨앗도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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