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나누고 만족할 줄 아는 삶

namsarang 2012. 12. 8. 17:47

생활속의 복음]

 

나누고 만족할 줄 아는 삶

▲ 신대원 신부(안동교회사연구소 소장)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살면서 특별히 '인간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인권주일이다. 인권은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부여하신 선물이기에 그 자체로 존엄하다. 존엄하기에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든지 인권을 강조하지 않은 때는 없었다.

 우리나라 헌법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1조 2항)고 천명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는 그 자체로 존엄하므로 그 어떤 제도, 법보다도 우위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할 권리를 가진다.

 오늘 복음사가가 요한 세례자 입을 빌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구원받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모든 사람이 주님 구원을 받게 될까.

 물론 대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그 구원에 대한 믿음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구원은 언제나 소수의 가진 자들이나 힘 있는 자들 것이고, 다수의 일반 서민계층은 홀대받고 변두리로 밀려나는 신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무렵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월만 흘렀지 인권 상황은 개선됐다기보다 오히려 더 악화해가는 것이 현실이 아니던가.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부여해주신 인권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홀연히 등장한 이가 있었다. 바로 요한 세례자다.

 그는 요르단 강 부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통해 주님께서 오시기에 앞서 실종될 대로 실종된 당시 인권 상황을 고발하고 바로잡아보려 노력한 분이다. 불행하게도 그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모여든 회개의 주인공들은 결국 침해된 인권을 보호받아야 할 가난한 서민이고 보면 참으로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백성의 지도자나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종교 지도자들, 학자들과 부자들은 거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변호자로 자처하던 종교인과 정치인, 지식인과 경제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들 대신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던(마르 1,6-7) '한 가난한 노숙자'가 홀연 주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돼 세상을 향해 외쳤다. 요한 세례자가 광야에서 첫 번째로 일갈한 것은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루카 3,7-8)는 것이다. 그러자 모여 있던 군중이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는다.

 요한이 그들 질문에 첫 번째로 대답한 것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였다. 군사들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3,14)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못 가진 이와 나눌 줄 아는 삶과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할 줄 아는 삶(필리 4,11-13)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 3,16)고 너무도 분명하게 고백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광야에서 외치는, 주님의 길을 고르게 마련하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나보다 못한 이들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돼야 할 것이다.

 사실 나눔은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삶이자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출발점이고, 만족은 자신의 일상생활 하나하나를 모두 주님께 맡겨드리는 순종과 겸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던가. 그렇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누구보다 먼저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 가진 자와 배운 자, 힘 있는 자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돼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이 땅에 빛이고 희망이신 주님께서 오실 길을 고르게 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