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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대원 신부(안동교회사연구소 소장) |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시는 성탄절이 가까이 왔다. 오실 주님을 모두들 요한 세례자처럼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자신을 낮추면서 맞이했으면 좋겠다. 또 교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우리는 요한 세례자가 백성에게 전하고자 하는 기쁜 소식, 기쁨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이기에 당시 최고 권력자 헤로데가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루카 3,20)일까.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력자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보였기에 헤로데가 "요한에게 여러 번 책망을 받게"(루카 3,19) 됐을까. 그 기쁜 소식이란 바로 참 하느님이시면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쯤해서 주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기 전, 빌라도 총독에게 한 말씀을 떠올려본다. 주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바로 이 말씀이 교회의 몸이요 머리이신 분, 요한 세례자가 광야에서 외쳐대던 '기쁜 소식이신 분'께서 하신 말씀이시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그분 몸의 지체로 자처하는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점점 말도 안 되게 돌아가는 현실 앞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가. 또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들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갈수록 혼탁해져가는 세상에서 다시금 우리는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요한 세례자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습대로 흘러가던 4대강 물이 인간 욕심에 의해 썩어 냄새가 진동하고, 강정마을 앞 구럼비 바위와 같은 아름다운 자연이 파괴돼 가고 있으며, 그것을 온몸으로 막으려는 사람들이 지금도 차가운 유치장에 감금돼 있고, 민중의 지팡이인 공권력이 미사를 방해하고 길에 떨어진 성체를 군홧발로 짓밟아버리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노동자들이 거리로 죽음으로 내몰리고, 어린 학생들이 세파에 떠밀려 옥상에서 추락하며, 시시각각 죽음의 위협으로 다가오는 핵발전소 건설이라는 헛된 욕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추운 겨울날 연탄 한 장 살 돈이 없고, 오르는 전기요금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 촛불로 추위를 녹여보려다 숨져간 이들 앞에서 우리는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따위 것에 아무런 관심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곧 오실 주님을 어떻게 기다리고 맞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있을까.
이 시대에 어떻게 진리를 증언하고, 어떻게 진리이신 분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을 것인가. 제대로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하다가 우리마저 혹시 "독사의 자식들아"(루카 3,7)하며 요한 세례자에게 호통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우리가 말로만 "주님, 주님"하고 외치면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요한 세례자가 외친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라는 따가운 질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가진 자들이 판을 치고 없는 이들이 변두리로 내몰리는 이 땅에, 하느님이시고 말씀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주님께서 오신다. 그분의 백성이면서 자녀인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까. 또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권고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까.
야고보 서간의 저자가 부드럽고 낮은 톤이지만 큰 내공이 실린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이 자못 심금을 울린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 1,22-24).
그렇다. 말씀이신 분이 곧 우리 가운데 오시니,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삶으로 증거하는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한다. '말씀'이시고 '기쁜 소식'이시며 세상을 구원해주실 분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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