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 제2주일이자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다.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사백주일'(卸白主日)이라고 했다. 부활대축일에 세례받은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깨끗해졌다'는 표시로 흰옷을 입고 있다가 오늘 벗었기 때문이다.
그 후 교회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 구원을 위해 오시고 사셨으며,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자고 당부한 데 따라 2001년부터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낸다.
우리를 내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림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요 도리다. 죽음의 세력을 꺾어버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숨어 지내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첫 마디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말씀하셨다.
무서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새로운 희망이 아닐 수 없다. 평화(平和)란 다툼이나 갈등 없이 평온하고 서로 화목한 상태를 말하며 '화평(和平)'과도 통한다. 사실 인생살이에서 아무런 다툼도 없고 갈등도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믿음이 살아나고 사랑이 움터 부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 모두 손을 맞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남음도 모자람도 없는 대동(大同)의 사회가 아니겠는가? 대동사회는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 서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평화를 원한다. 하지만 평화를 해석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서민,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평화는 곧 부자와 권력자, 강대국의 생각이다.
세상은 평화라는 참으로 소중한 언어를 갖고 있고, 또 그것을 원하면서도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무기를 만들고, 평화를 운운하면서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내리누르려는 왜곡된 평화관(平和觀)을 갖고 있다. 결국 세상이 주는 평화는 그 의미와는 다르게 심각하게 훼손돼 힘의 균형이 깨지면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어 위험천만하다.
이러한 평화는 무늬만 평화이지 실제로는 사람에게 참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핵무기를 만들고 상대방을 단숨에 무너뜨릴 정도로 절대적 힘의 우위에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는 우리 시대의 '평화 논리'는 거짓되고 허황한 주장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오르시어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고 전제하신 뒤, 당신이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이별의 만찬을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지극히 간절한 어조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란 어떤 평화일까? 또 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예수님께서는 평화와 평화를 일구는 일꾼으로서 제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돼야 할 조건을 갖추기를 요구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참된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평화의 일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누구의 죄든 용서하기 시작한다면, 거기서부터 평화가 시작되고 믿음과 사랑이 되살아나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실까?
예수님은 평화이시다. 평화이신 분이 평화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며 잘 일궈나가라고 하신다. 평화의 절대 규칙은 '믿음'이다. 믿음이 전제되면 사랑이 싹트고, 사랑이 싹트면 정의가 꽃피우게 된다. 사도 토마스도 결국 잃어버렸던 믿음을 평화이신 분으로 말미암아 되찾았고, 비로소 평화이신 그 분이 곧 부활이신 분임을 고백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사도 토마스는 이제부터 평화를 일구는 일꾼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땅의 극변까지 가서 부활을 선포하는 증인으로 살게 될 것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부활이신 아드님 안에서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와 믿음을 주시어 부활의 삶으로 부르신다.
한국 사회에서 정의와 평화는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가. 우리가 부활하시고 평화를 주신 분과 함께하는 일은 그분 부르심에 어떠한 태도로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다.
| ▲ 신대원 신부 (안동교회사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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