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일 (루카 7,11-17) 연중 제10주일이다. 지난주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내놓으신 것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요한 17,26)을 실현하시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우리와 함께 상호 내재적 삶을 원하시고 실현하신 것은 전적으로 가련한 우리에게로 향하시는 그분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며, 이 사랑은 곧 우리가 당신 안에서 참된 평화를 얻게 하시려는 것(요한 17,33)이다.
오늘 예수께서는 외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루카 7,13) 하고 위로하신다. 그분은 위로하실 뿐 아니라 몸소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면서 관을 메고 가던 사람들을 멈춰 서게 하셨다(루카 7,14).
생명이신 분이 앞으로 나아가던 죽음을 멈추게 하셨다. 또 그 죽음을 메고 가던 사람들마저 더는 죽음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정지시켰다. 마침내 생명이신 분이 죽음에 휩싸여 가던 바로 그 젊은이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5)고 이르시면서 죽음에 덮인 이를 죽음에서 들어 올려 생명 있는 이로 바꿔놓으시고는 그의 어머니에게 되돌려주셨다. 교회의 몸이신 분이 슬퍼하는 가엾은 이를 보시고 위로해 주셨고, 사람을 위해 당신을 산 제물로 내놓으신 분이 죽은 사람의 몸을 생명 있는 몸으로 되돌려 놓으셨다.
교회의 몸이신 분이 이처럼 작은이들에게 위로를 보내고, 생명을 빼앗긴 이에게 몸소 생명을 되돌려 주셨다면, 그분을 머리로 하는 교회공동체 또한 그분의 삶을 빼닮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는 아프리카 선교사제였던 고 이태석 신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선교사로서 그분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 마, 톤즈'는 세간에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많은 관객에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이태석 신부는 일반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고, 주님 부르심에 의해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해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그는 곧 아프리카 수단 남부에 있는 톤즈(Tonj)라는 지역으로 선교를 떠났다. 그리고 2008년 11월 한국에 휴가차 잠시 들렀다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서 다시는 그가 사랑하는 이들이 기다리던 톤즈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짧다면 짧은 투병생활 끝에 48세로 선종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 마, 톤즈'는 교회 공동체가, 또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주님의 종'이 누구인지를 이 영화는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펼치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라"(이사 42,1-4) 하고 외치면서 주님의 종 모습을 선포하고 있다.
공정(公正)이란 중용(中庸)이며, 중용은 진리를 지키는 일이다. 진리를 지키는 일은 생명을 사는 일이다. 생명을 사는 일은 평화를 일구는 일이며, 평화를 일구는 일은 절망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샘솟게 하는 일이다. 희망을 샘솟게 하는 일은 가난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을 끌어안는 일이며, 작은이들을 끌어안는 일은 그들 눈에 눈물을 닦아주고 함께하는 일이다. 함께하는 일은 곧 사랑의 삶을 사는 일이다. 사랑의 삶을 사는 일이 곧 성체성사의 삶을 사는 일이고, 부활의 삶을 사는 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울지 마라"고 하시며 우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들의 삶에 몸소 들어가셨다. 아마도 이태석 신부도 성체성사이시며 사랑이신 분의 삶에 동참해 가엾은 이들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 하였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는 동시대 사람들, 특히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내려가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울음을 웃음으로 바꿔주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가엾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울지 마라"하고 따스한 손길을 건네신다.
| ▲ 신대원 신부 (안동교회사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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