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왕 대축일(루카 23,35ㄴ-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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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대원 신부 (안동교회사연구소 소장) |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며, 전례력으로 한 해 마지막 주일에 서 있다. 그 끝날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복음말씀을 듣게 된다."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이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가 예수님께 청원한 내용이다. 이 청원은 사형선고 받은 죄수가, 함께 사형수로 십자나무에 매달린 임금님께 드리는 말씀이다. 이 청원을 들으신 임금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고 흔쾌히 약속해 주신다.
사형수의 청원을 받아들이신 사형수 임금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거룩한 만찬을 행하실 때,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고 간곡하게 당부하는 분이시다. 죄인의 청원을 기꺼이 들어주시며 죄인들에게 당신의 거룩하신 몸을 맡기시면서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간곡하게 청원하시는 분, 사람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눠 주시고 우리를 살게 해주시며 우리를 당신 나라에 불러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임금이신 분은 당신 나라에 대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고 말씀하신다. 또 당신이 세상에 오신 까닭에 대해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고 분명하게 강조하신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신 그분은 당신 나라의 통치방법에 대해서도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2-44)고 설명하신다.
우리 임금이신 분은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으시는"(마태 18,10) 분이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루카 4,18) 분이시다. 또 그분은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고"(요한 10,9)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으로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게"(요한 11,25-26) 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요한 13,1 이하),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요한 15,13-15)고 하신다. 그분은 또 세상창조 때부터 당신의 친구들을 위해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매우 분명한 어조로 밝히시면서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듯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처해 있는 지금의 세상은 어떠한가? 굶주리는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도 먹을 것을 나눠주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 든다.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행복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 그득한데도 그들에게 목을 축여 줄 물 한 모금 건네지 않는다. 나그네를 따듯이 맞아들이기는커녕 문전박대한다. 희망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보다 점점 더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고 보면, 우리에게 오신 분을 임금으로 섬기는 신앙 공동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는 분명해진다.
이제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신앙의 해'를 마감한다. 하지만 한 해의 마감은 또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인 것처럼, 신앙의 해를 보낸다는 것은 이제 신앙인으로서 새로운 출발 선상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참으로 왕이신 분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감히 청원을 드려왔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그분께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 몸을 맡기시고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당부하신 바로 그 청원을 우리는 지금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살펴봐야 할 때다.
왕이신 분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감히 청원드릴 수 없었다면, 이제부터는 그분이 당신을 기억하고 행하라고 하신 그 말씀대로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이 행하신 바를 실행하려고 노력하고 애를 써야 할 때다. 그래야 그분에게 선택받은 백성, 충실한 종, 사랑스러운 자녀, 벗인 동시에 형제자매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임금이신 분께 "주님이시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마지막 날에 저희를 기억해 주십시오. 아멘!"이라고 그 사형수처럼 청원을 드릴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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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생활 속의 복음'을 연재해주신 신대원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필자는 조재형(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신부님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