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루카 20,27-38) 연중 제32주일이면서 위령성월의 중순을 시작하는 날이다.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좋은 시기다. 지금의 시기는 온갖 자연 만물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다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때다. 이 시기는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도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인생일까를 일깨워주는 기회의 때가 아니겠는가?
사실 삶이 없는 시간은 죽음만이 판치는 시간이다. 삶은 순간순간 생명을 이어가는 움직임이다. 생명을 얻었어도 그 생명을 이어가지 못하면, 그는 죽음 속에 버려진 존재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즈음의 세상은 마치 자신의 삶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가지려 드는 듯 보이는데, 그 소중한 것이란 곧 돈과 명예와 권력 따위다. 이것들은 자신의 삶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들인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생명 없는 것들, 그저 삶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자신의 목숨을 건다.
생명 없는 것은 곧 죽어 있는 것이고, 죽음 속에는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께서 계시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마치 살아있는 것, 생명 있는 것, 자신의 목숨을 언제까지나 보존해 줄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오늘 복음을 읽어보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형사취수(兄死娶嫂)'라는 법을 내세워 '부활'의 부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루카 20,28-33). 형사취수법은 형이 죽었을 때 그의 동생이 형수를 부인으로 맞아들일 수 있다는 법이다. 그리고 부활은 죽은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다시 사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사두가이들의 공격성 질문이 제기된다. 즉 형도 죽고 동생도 죽고 형수도 죽었는데, 부활하면 형수는 누구와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두가이들의 질문은 나름대로 상당히 논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 지금 이 시대 사회 통념상으로도 일정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굳이 예수님 말씀을 빌리지 않고 유가적(儒家的) 사상으로도 충분히 답변할 수 있는 내용이다.
유가사상에 있어 인간의 죽음은 결국 아무런 형체도 느낌도 없는 기(氣)로 돌아간다. 이 사상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그 인간은 맑은 기(淸氣)와 탁한 기(濁氣)라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맑은 기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흐리고 탁한 기는 땅으로 내려가는데, 이를 혼(魂)과 백(魄)이라고 한다. 하지만 끝에 가서는 두 가지 기가 모두 흩어져 버리고 만다. 따라서 인간은 기가 모이면 사람이 되고 흩어지면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남는 것은 추억이나 기억에 남게 되니,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행위는 추모(追慕)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부활사상이 배제된 것도 사실이겠지만, 적어도 사람이 죽었을 때 형사취수라는 모세의 법을 적용시키기는 부적절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매우 구체적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루카 20,34-37).
예수님의 이 말씀, 곧 부활은 현실적 삶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부활의 삶은 인간적 상상력이나 공상 따위를 뛰어넘는 생명이신 하느님의 주재(主宰) 행위이시기 때문이며,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사람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저 얻게 된 최고의 '은총'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답변을 마무리하시면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하느님은 생명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신 분이 우리를 살게 해주신다. 그러니 죽음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생명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생명이신 분을 만날 수가 없게 된다. 거기에는 생명이신 분도 계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령성월을 보내면서 우리는 곧 나는 죽음 속에 있는가, 아니면 생명 속에 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죽음의 문화를 좋아하면 죽음으로 들어갈 것이고, 생명의 문화를 좋아하면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명백하지 않겠는가? 지금 세상은 점점 더 죽음의 문화를 조장하고 스스로 그 문화를 즐기려는 경향이 짙어간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죽음 속에서 죽은 이로 남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를 살리고 끊임없이 부활에로 초대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바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 ▲ 신대원 신부 (안동교회사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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