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성전

namsarang 2015. 3. 8. 12:33

[생활 속의 복음]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성전

 

사순 제3주일(요한 2,13-25)


 

▲  박재식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



후배 신부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 진 적이 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며 TV를 보는데 ‘중년 남녀의 짝 찾기’를 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출연 여성은 대부분 50~60대, 남성은 60~70대였고 배우자 없이 홀로 사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각자 새로운 상대를 만나는 이유, 상대의 조건 그리고 만남 준비 과정을 보여줬습니다.

그 후 주변 어르신들에게 ‘짝 찾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봤습니다. TV에 출연한 분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만났을까? 진정한 사랑을 찾는 분들일까? 아니면 다른 동기와 목적이 있지는 않을까? 미국에서 부모 재혼 문제로 홀로된 부모와 자녀가 법정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을 많이 보았기에 저는 부정적 측면이 더 많다고 느꼈습니다.

요즘 어르신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대중가요를 들으면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사 중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멋지고 힘차게 살아온 지난날을 추억하고, 세월이 더해가면서 인격 완성을 향해 가는 멋진 마무리의 시기인 노년에 지난 시간을 부정하고 ‘질풍노도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내용이었기에 너무나 마음이 답답하고 아쉬웠습니다.

저는 전쟁의 상처와 배고픔을 극복하고 발전을 이룬 어르신 세대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폐쇄적 사고방식의 신분제 사회(조선)와 식민지 사회를 거치면서도 기회주의적 병폐로 인한 지연, 혈연, 학연이라는 구시대적 폐습을 버리고 실질과 노동의 가치를 중심에 놓고 살아온 우리의 삶이 너무나 멋집니다. 지금의 시대를 만들어가는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이러한 행동을 하셨는지 함께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유다인들이 정결례에 쓰는 물독 여섯 개에 물을 채워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요한 2,6)을 통해 구약의 전통과 가치들이 인간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종국에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는 무관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잔치의 기적을 통해 구약의 가치보다 하느님이 주시는 자비가 얼마나 인간을 기쁘게 하는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건을 통해 확실하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단순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쇄신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공적인 대화, 즉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는 말씀으로 성전에 대한 개념을 확실하게 정리하십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찾아가 희생 제물을 바치면서 제사를 드리기보다는 자신의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해지게 됩니다.

오늘 독서와 화답송은 율법에 대한 본래적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던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됐습니다. 구약의 백성이 즐겼던 축제, 그들이 기념했던 사건들이 모두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게 우리의 구원 사건이 됐고, 희망의 메시지가 됐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거의 부정적이거나 우울한 소식들입니다. 저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외적인 것에 집착하는 많은 이들의 모습,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말과 행동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너그러움과 자비라는 하느님다움을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르신’이 된다는 것은 많은 체험과 경험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주는 지혜와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어지는 행동양식을 갖춰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처럼 말하고 옷을 입는 등 외적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상기시키시며(요한 2,23) 외적인 모양이나 양식을 지양하고 하느님과 약속을 실천하고 대화하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성전임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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