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복음]
단절을 통한 새로운 시작
사순 제4주일(요한 3,14-21)
▲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
오늘 시편(화답송)을 보니 카리브해 출신 흑인 혼성 그룹 ‘보니 엠’(Boney M)이 생각납니다. 1978년 발표한 ‘바빌론의 강’(Rivers of Babylon)은 레게음악, 흑인 특유의 리듬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흥겹게 했습니다. 하지만 노래의 가사는 흥겨운 리듬과는 다르게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득 배어있습니다.
‘바빌론의 강’의 내용과 비슷한 처지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 합창 ‘가라, 내 생각이여, 금빛날개를 타고’를 들으면서 한 주간을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려 합니다. 주변 상황이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더라도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 자비를 기억하면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복음은 정말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에 몰래 찾아온, 당대 유명한 바리사이 니코데모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하신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말씀과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위로부터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고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영으로 태어나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경의 여러 말씀과 신학적 설명을 통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라는 말씀에 대한 묵상과 해설을 통해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합니다.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뱀인지 나와 있지 않지만 민수기 21장 4-9절에 죽음의 원인과 새로운 생명이 설명돼있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뱀같이 슬기롭고”(마태 10,16)라는 구절 외에는 뱀은 간사하고 사람에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동물로 묘사됩니다. 하느님 본질과는 대립적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뱀은 당시 사회에서 지혜의 상징이자 치료의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뱀은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생명’과 관련이 있는 사상이자 학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세는 주님 말씀을 따라 ‘구리 뱀’을 만듭니다(민수 21,9). 구리는 이집트가 히타이트 국가와의 전쟁으로 철기문명을 접한 후 이집트인들의 자존심이 됐습니다. 전쟁에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신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도구이자 버려야 하는 폐물이 되었습니다. 즉 구시대의 가치와 우상을 높이 매달아 단절시키는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생명을 살게 된 것입니다.
구리 뱀 사건으로 아담 이후 단절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모세와 그의 동료들은 노예로 살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폐습을 높이 매달았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들어올린다’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들어올려짐’은 단절과 외면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죄수를 높이 매달고 온갖 욕설과 폭행을 하는 인류의 문화에서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또 다른 측면은 희생과 봉사를 통한 영광과 명예의 의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극히 존경하는 경우 어깨 위에 들어올립니다. 또 군중 앞에 올려서 환호와 갈채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십자가에 지니고 있는 욕심과 편협한 사고방식을 매달고 철저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한편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한없는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매일 매일 예수님을 따라가며 살아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고통받던 이집트 시대에 하느님과의 소중한 만남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그릇된 즐거움에 철저히 순응하는 삶으로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처절한 치욕과 아픔을 체험하는 순간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됐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우리에게도 또 다른 십자가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모두 구시대 유산과의 단절을 통해 위에서부터 새로이 태어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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