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namsarang 2015. 3. 22. 12:23

 [생활 속의 복음]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원고를 쓰기 위해 한글판 성경을 보면서 문득 한국 교회가 신자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신자들을 정말 똑똑한 지성인으로 생각하는지, 혹은 성경을 읽지 않는 신자이기를 바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앞뒤 없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요한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설명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교회 성경을 보니 요한복음 1장 19절(머리글 다음) 앞에는 ‘표징의 책’(II. The Book of Sings), 13장 앞에는 ‘영광의 책’(III. The Book of Glory)이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또한 「라티노아메리카노」(Latinoamericano)라는 스페인어 성경에도 설명과 더불어 곳곳에 메데인 문헌(1968년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단 총회 문헌)을 비롯한 교회 문헌을 첨부해 신자들이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을 만들기까지 고생하신 분들에게 딴죽을 걸거나 그분들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쯤 이런 부분을 생각해 봤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골 본당 사제로 살아가고 있는 저도 요한 복음서를 이해하고 묵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신자분들의 기도나 성경에 대한 열정은 다른 지역 교회보다 월등합니다. 그에 반해 자신의 신앙 증거, 타 종교인과 대화에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도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 전체 맥락 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장 19절에서 12장까지 예수님은 7가지 기적 사건과 7문장(나는 …이다)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군중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관점과 시각에서만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12,37)라는 결말이 나옵니다.

복음사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못한 원인을 “그들은 눈이 멀었고 마음이 무디어졌다”(요한 12,40)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기본으로 오늘 복음의 핵심 문장인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이별의 순간에 여러 번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영광일까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고통의 내용인 요한 복음 13장 이후 부분을 미국 성경은 왜 ‘영광의 책’이라 했을까요?

저는 축구, 야구 등 스포츠를 즐기고 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많은 남미 축구선수들은 경기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 선수들은 경기 중 종종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과연 그런 행동이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지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을 앞두고 누군가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독일과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님들이 자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기도를 하는 모습을 상상한 그림이었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어떤 이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할까요?

교우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루터 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길 기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해서 대기업에 정규직 사원으로 입사하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건가요? 시험에 떨어지거나 취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부족해서인가요?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본성이 언제 가장 잘 드러나는가’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 정의, 평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자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진정한 정의, 평화를 체험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김 추기경님의 명언 중 하나인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 말라”는 말씀에서 하느님 자비를 느꼈습니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열광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멋진 외모와 미소, 아니면 검소한 생활 태도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이웃의 손을 잡아주셨고, 그들 이야기를 들어주셨기에 열광한 것입니다. 교황님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황님의 강론이나 행동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자주 느낄 수 있어서 열광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