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화해와 일치는 대화를 통하여

namsarang 2015. 6. 21. 12:45

[생활 속의 복음]

화해와 일치는 대화를 통하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 18,19-22)


 

▲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6월 하순에 접어들면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제가 부제품을 받기 전 겪었던 갈등과 남북 관계입니다.

신학생 시절 수녀님 두 분이 상주하고 계신 공소에서 생활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수녀님 한 분은 참 겸손하시고 너그러우셨습니다. 하지만 젊은 수녀님은 시골 어르신들을 마구 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공소에서 열리는 여러 회의 때 반대와 비방의 목소리를 냈고 뒤에서도 다른 이를 안 좋게 이야기했습니다. 공식ㆍ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저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도 제시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교우 어르신들과 아이들에게 무척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대품 피정 전에 주변 청년들을 동원해 작전을 세워 수녀님과 저의 대화의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2시간가량 이어진 진솔한 대화를 통해 참회하고,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도 편안하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으로의 첫발을 디딜 수 있었습니다. 모든 화해의 시작은 대화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됐습니다. 만남을 통해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들어주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대화입니다.

창세기(1,28)에서 하느님께서는 창조물 중 유일하게 인간과 대화를 하십니다. 죄를 지은 첫 인류에게 벌을 주시지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시며(3,21), 당신께서 용서하시는 화해를 실천하십니다. 탈출기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파라오에게 보내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백성을 내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라는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종살이하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하느님과의 대화가 진정한 자유와 해방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분단 70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북녘 가족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지요? 최근 2년 정도 방송과 언론 그리고 정부의 담화, 발표에서 북녘 가족들에게 긍정적이고 자비와 사랑을 포함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본 기억이 없습니다.

물론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 6월 7일 자 평화신문, 가톨릭신문을 보면 교회는 ‘용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의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옳고 바른데 너희는 잘못하고 있으니 용서하겠다고 하면 과연 진실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매번 등장하는 예가 통일 독일입니다. 과연 독일과 우리의 상황이 같거나 비슷할까요? 우리에게는 6·25라는 비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족과 형제 간에 서로 죽고 죽였던 비참한 아픔이 있습니다. 지금 남북은 대화도 나누지 않고 서로를 비방하며 원수처럼 대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를 전제로 한 만남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다가서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고 통일과 일치를 원하시는 모든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북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그들의 헌법을 읽어 보셨는지요? 북녘 가족들이 바라는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의 사회인지 생각해보셨나요? 그들과 대화를 위해 우리는 얼마나 그들 입장에서 현실을 바라보려 했는가 하는 반성을 해 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지난해 8월 17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 북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길 당부하시면서 “여러분은 같은 언어, 가족의 언어를 씁니다. 여러분은 같은 언어를 말하는 형제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북한의 가족들과 편안하게 부담 없이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며 대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입니다.

정부와 국민 그리고 국가 간 대화가 단절돼서 요즘 얼마나 고통(메르스)과 공포(탄저균, 보툴리눔)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대화를 통한 평화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