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생활 속의 복음] 도대체 왜 이리 비참하게 살까요

namsarang 2016. 9. 25. 10:06


[생활 속의 복음] 도대체 왜 이리 비참하게 살까요


연중 제26주일(루카 16,19-31)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원시시대가 까마득한 과거를 말하는 줄 알고 자랐습니다. 그 시대에는 야만인만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현대 세계도 그에 못지않은 야만인의 세계, 아니 더 야만적인 세대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해 놀랐습니다. 과거에는 농업 기술도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재산을 합쳐봐야 요즘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미 현대 사회가 창출하는 재화는 역사 이래로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이 어마어마합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더 야만적입니다. 힘세고 부유한 사람들이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부자 나라일수록 무기 수출을 통해 많은 돈을 법니다. 가난한 나라, 전쟁하는 나라는 계속해서 그 비싼 무기로 서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만든 곳이 아닙니다.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주인인 세상에 와서 일생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인데, 너무 함부로 세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가장 값진 자연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지구라는 별에는 물이 풍부합니다. 산천초목이 우거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온갖 곡식과 과일이 잘 자라는 신비스러운 별입니다. 아직 인간의 과학이 지구와 같은 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별에서 너무나 비극적인 일들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폭력이 자행됩니다. 폭력의 종류도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로 있으면서 여러 형태의 폭력에 내몰렸습니다. 그리고 6·25 전쟁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일들을 기억하면서도 또 다른 폭력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남과 북은 폭력의 능력을 자랑하면서 서로 으르렁거립니다. 그러는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은 복지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온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는 테러의 위협으로, 이제는 한국에서도 기차역에서마저 보안 검색을 한답니다. 과거에 폭력을 당한 데 대한 증오심 때문에 오늘 테러 공격에서 안전한 곳은 세상 어디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폭력 문제는 빈부의 격차에서 시작되고 빈부의 격차로 결말을 짓습니다. 그리고 혁명이나 전쟁이라는 폭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덤빌 것입니다.

누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고, 또 누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금수저를 가진 사람만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순된 운명을 인간이 힘을 합쳐서 해결해 내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겸손한 사랑, 진실한 사랑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인간과 나누셨습니다. 죄를 짓고 죽어야 하는 인간의 비참함을 해결하고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영원한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경하게 빈부의 격차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빈부의 격차 문제는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해 많은 예언자가 지적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면 착취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못살게 하기에,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자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힘줘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서로 건널 수 없는 넓고 깊은 구렁을 인간이 만들어 놓으면, 인간이 뛰어 건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자비가 지극하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인이신 이 세상의 재산을 서로 나눠 사용하면서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가진 것을 서로 너그럽게 나누면서 참된 희망을 살아가면, 야만인으로 살아가는 비참함을 끝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