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
오늘 독서와 복음은 두 과부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에서는 '가난한 과부'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과부라고 해서 다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홀아비는 이가 서 말, 과부는 은이 서 말"이라는 말이 있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말하는 '과부'라는 표현은 보호 받아야 할 대상, 주변에서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소외되고 힘없는 자를 뜻합니다.
제1독서의 사렙타 과부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 사랑을 음식으로 실천했고,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진 돈을 모두 봉헌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가장 구차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신자들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고 하느님이 모든 것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행위로 교무금과 헌금을 봉헌합니다. 이는 신자들이 자신의 몸은 물론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신앙고백의 중요한 표현이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고,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 1/10을 봉헌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십일조라고 부릅니다.
레위기를 보면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레위 27,30)라고 하셨고, 말라키서에서는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말라 3,1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통해 받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하느님께서 직접 보증해 주셨지요. 가난한 청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서로 성공을 다짐하면서, 성당에 가 하느님께 평생 동안 자신의 수입의 1/10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매달 자신의 수입에서 무조건 1/10을 떼서 성당에 봉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수입이 워낙 별 볼일이 없어 수입의 1/10은 아주 적은 액수였지요.
시간이 지나 두 청년 중 한 사람이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됐습니다. 또 다른 청년 역시 그렇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둘은 자신들이 약속했던 수입의 1/10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둘 중 성공한 청년에게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 말합니다.
"여보게 친구, 사실 내가 젊은 시절에 자네와 함께 맺은 약속을 이제는 취소하고 싶네. 내가 내 수입의 1/10인 10만원을 성당에 봉헌할 때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1/10이 몇 억씩 되다보니 얼마나 아까운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이 행동을 그렇게 오랫동안 했으니 이제는 그만 둬도 되지 않을까?"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이 친구가 수십 억씩 버는 것이 이제 싫은가 봅니다. 도로 10만원씩 봉헌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함을 잊지 않고 겸손하게 나누며 살아야 하느님의 축복이 지속됩니다. 많은 축복을 받고도 하느님께 감사의 표현을 지속하지 못해 그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이 성경 안에 넘쳐납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돼서는 안 될 터인데 우리 현실은 어떠합니까? 천주교 신자들의 봉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에 한참 못 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십일조를 내면 죽는 줄 알고, 개신교 신자는 십일조를 안 내면 죽는 줄 안다"는 웃지 못 할 말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난한 과부들의 정성과 축복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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