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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가 꽃보다 아름다워

namsarang 2009. 11. 18. 22:34

[ESSAY]

사제가 꽃보다 아름다워

  • 홍문택 신부

 

        ▲ 홍문택 신부

60을 바라보는나이에다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바르고 사는 사제이면서도 내 성격, 생각, 취향에
맞춰주지 못할 때 못마땅한 감정을
경직된 말로 표현하고 사는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결혼 25주년과 50주년을 기념하는 은혼식(銀婚式) 금혼식(金婚式)은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됐다던가. 주로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매년 결혼기념일에 미사나 예배로 축하하던 것에서 유래된 풍습이라고 들었다. 이날은 자녀나 친지들이 주인공 부부의 옛 결혼식을 재현해준다. 은혼식에는 은을, 금혼식에는 금을 선물하고 부부여행을 하는 등 특별한 시간도 보낸다. 은보다 의미있고 금보다 귀한 날이다.

그렇지만 은혼식 금혼식을 어떻게 치르든 무슨 상관인가. 부부의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25년, 50년 동안 한 가정을 이루어 현재까지 사랑과 신뢰를 쌓고, 그리고 함께 했던 삶의 흔적을 되새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미쁜 일이 아닐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결혼을 하지 않는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에게도 이와 유사한(?) 기념일이 있다. 사제생활 25주년을 은경축(銀慶祝), 50주년을 금경축(金慶祝)이라 기념한다. 이때 사제 자신은 하느님께 봉헌한 현재까지 삶을 되돌아보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다. 은경축이나 금경축을 맞게 되면 신자들은 사제에게 많은 기도를 해주고 분에 넘치는 잔치를 차려주기도 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나도 3년 전 은경축을 지냈다. 그때 했던 생각은 '내 삶에서 은경축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였다. 아니면 꾸준하고 변함없는 쪽에 삶의 방향을 둘 것인가. 어느 쪽이든 의미는 있겠으나 나는 수년 전부터 계획해 두었던 일을 조심스레 펼치기 시작했다. 저소득층 가정의 청소년들, 그리고 부모가 해체된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을 위해 대안학교를 짓는 일이다. 고교 과정으로 하되 전원 무료 숙식 제공!

그런데 막상 의욕이 능력보다 앞서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 숙명같은 것인가. 손에 쥔 건 9년 전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사시던 작은 연립주택과 내 승용차뿐이었다. 그걸 팔아 비교적 땅값이 싼 곳을 수소문하다 이곳에 왔다. 38선 이북이고, 한탄강 근처라 그다지 외진 곳이 아니다 싶었는데 외지긴 외진 곳인가 보다. 신문배달, 통닭배달, 우유배달, 세탁물 수거와 배달, 그리고 가끔 바쁠 때 시켜먹는 자장면 배달이 전혀 안 되는 곳이니 말이다.

이곳에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나에게 너무 힘든 게 아니냐고 걱정하는 분들이 꽤 많았다. 지인들의 뜻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주님 빽'만 너무 믿는 것 같다고 핀잔을 주시는 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제가 하는 일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의로운 일에 '그분'이 함께 한다는 믿음, 우리 사회에 갸륵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는 믿음!

그러나 정작 학교 건물이 올라갈수록 걱정되는 건 따로 있다. 친구들 간 '왕따'니 '빵셔틀'이니 '교내 폭력'이니…하는 우려스런 학원 풍토에서 우리 작은 대안학교는 과연 그런 냉해(?)로부터 따뜻하게 보호될 수 있을까. 하루에 열 시간 정도 함께 지내며 생활하는데도 별의별 경우가 다 생기는데 하물며 친구들과 함께 먹고, 자고, 공부하고, 같은 공간에서 24시간을, 그리고 3년 내내 부대껴야 하는 십대 청소년들에게 아무 문제 없기를 바란다는 게 쉬운 일일까.

우리 가톨릭 교회는 사제가 될 때까지 3가지 충족조건을 면밀히 지켜본다. 그 3가지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 건강함과 지적 능력과 학식 그리고 생활 규범을 말한다. 이상의 3가지 조건이 어느 정도 채워질 때 사제품을 수여한다. 그 말은 그중 어느 것이 부족하면 냉혹히 사제품이 수여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위 3가지 조건 외에 또 다른 사유로 사제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게 바로 함께 생활하는 구성원 등과 겪게 되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다. 그 어려움 때문에 중도탈락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성당을 처음 찾는 예비신자들을 위해 일하는 봉사자들이 몇 년 전 나에게 문건(?) 하나를 내밀고 건의한 일이 있었다. 봉사자가 워낙 부족했던 탓에 사람을 새로 선발해야 하는데 이런 기준으로 뽑으면 신부님 취향에 맞겠냐며 적어낸 내용이었다. '신부님 말씀을 즉시 알아듣는 사람, 말씀이 떨어지면 만사를 제치고 100m를 15초 안에 냅다 달릴 수 있는 사람, 쌀 반 가마 정도는 직접 끌고라도 움직일 수 있는 힘 있는 사람….'

내용을 읽는 순간 모두 한바탕 웃고 말았다. 내 취향 내 성격을 잘 꼬집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부끄럽게도 평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어느 정도 정확히 알고 적어낸 선발 기준이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다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바르고 사는 사제이면서도 내 성격, 내 생각, 내 취향에 맞춰주지 못할 때 못마땅한 감정을 경직된 표정과 말로 표현하고 사는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대안학교를 세우면서 진짜 걱정은 그러한 내 자신이었다.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는, 어느 누구도 왕따가 되지 않는, 온정과 배려가 가득찬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걱정의 중심에 사실은 나 자신이 서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꽃이 아기자기 피어나고, 꿈을 여는 노랫소리가 예쁘게 울려 퍼지는 산골짜기 학교, 그래서 매일매일 꽃처럼 아름답게 희망을 여는 '화(花)요일 아침 대안학교'의 건물을 지으면서, 학교를 짓는 일보다 학교 안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우물을 깊게 파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설친다. 과연 해낼 수 있을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