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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한 켤레에 '손때 묻은 사랑'

namsarang 2009. 11. 22. 15:59

 

구두 한 켤레에 '손때 묻은 사랑'


【평신도주일에 만난 사람들】구두 수선가게 운영하는 정은미씨

▲ 언제나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는 정은미씨는 "낡고 지저분한 구두를 깨끗이 손질해주는 행복한 직업을 갖게 해주신 하느님께 항상 감사드린다"며 백만불짜리 미소를 지어보였다. [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작은 컨테이너 안에서 구두 닦는 사랑의 손...
"남에게 기쁨 주니 나도 덩달아 기쁜 일이죠"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서울 혜화역 근처에서 구두수선점을 운영하는 정은미(체칠리아, 45)씨가 손님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구두수선점을 운영하는 여성을 좀처럼 보기 어려운 까닭이다.
 
   정씨는 조그만 컨테이너 안에서 하루 11시간 넘게 구두와 생활한다. 13년 전 집안 형편 때문에 돈벌이에 나서야 했던 정씨는 이곳저곳 전전하다 우연히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
 
   "아는 사람이 구두수선업을 해서 잠시 일을 도와준 적이 있어요. 어느 날 장사 끝날 무렵, 구두에 흙이 잔뜩 묻은 건설노동자 한 분이 내일 결혼식이 있다며 구두를 맡겼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 행복한 얼굴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어요."
 
   정씨는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구두수선업을 하느님이 골라주신 사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직접 가게를 차렸다. 하지만 여자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지만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구두닦이'라며 천대하는 시선이 많았어요. 게다가 여자가 이 일을 한다니까 신기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죠."
 
   정씨는 자신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그는 "남에게 기쁨을 주고 나도 덩달아 기쁜 돈벌이가 흔치 않다"며 환하게 웃었다.
 
   정씨 가게를 찾는 손님들은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린다. 한 쪽 선반에 성경과 매일미사책, 「통하는 기도」 등 천주교 관련 서적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유리창에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유지를 담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스티커가 붙어있다.
 
   20여 년 전 결혼하면서 세례를 받은 정씨는 신앙생활도 일만큼 기쁘게 하고 있다. 주일은 손님이 가장 많은 날이지만 단 한 번도 가게를 연 적이 없다. 주일만큼은 하루 종일 하느님과 가까이 있고 싶어서다. 대축일이면 평일에도 문을 닫는다.
 
   아침ㆍ저녁기도와 틈틈이 바치는 묵주기도는 정씨의 주요 일과 중 하나다. 정씨는 스스로 "거리 선교사"라고 부른다.
 
   "구두를 수선하는 동안 스티커나 성경을 보고 궁금해하는 손님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에게 천주교에 대해 이것저것 친절하게 말씀드리죠."
 
   혜화동성당과 가톨릭대 신학대학이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터라 신학생과 수녀, 신자 손님을 만날 기회도 많다. 그들한테 선물받은 묵주가 안방 서랍에 가득하단다.
 
   "손수 만든 팔찌 묵주를 풀어서 주신 수녀님, 손때 묻은 은묵주를 선물해 준 신학생, 그리고 수많은 신자 손님들…. 구두 수선하는 동안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갖고 있던 묵주를 선물해 주는 분이 많아요. 묵주를 받은 날은 그 분을 위해 묵주기도를 꼭 바치죠."
 
   솜씨가 꼼꼼하고 늘 밝은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정씨는 단골손님이 많다. 하지만 손님 수에 비해 수입은 그리 많지 않다.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 손님에게는 요금을 깎아주거나 아예 받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가게를 찾은 한 수녀는 "정씨는 일도 열심히 할 뿐아니라 본받아야 할 아주 훌륭한 신앙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몇 년 전 구두를 수선하러 온 한 부제가 여느 손님처럼 정씨에게 "왜 이 일을 하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정씨는 "부제님은 왜 그 길(성직자)을 가십니까?"라고 미소로 되물었다. 서로 빙그레 웃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