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 현장

노숙자 삶을 준비한 재가진폐환자

namsarang 2009. 12. 23. 22:27

[사도직 현장에서]

 

노숙자 삶을 준비한 재가진폐환자


                                                                                                 정점순 수녀(프라도 수녀회)


   나는 산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특히 험준하면서도 장중하고 아기자기한 강원도의 산은 나에게 늘 매력적이었다.

 헌데 진폐증 환자들을 만나면서 산을 잃어버렸다. 그 아름다운 산 너머에 수직으로 파들어간 탄광, 그 지하막장에서 곡괭이와 톱, 작은 램프 하나에 의지해 평생을 살아간 광부들의 삶을 보고나서였다. 탄광에서 일했던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진폐증, 폐가 굳어져 나중엔 호흡조차도 힘들어지는 불치병을 앓는 이들 환자들을 보고나서 산의 매력을 잃어버리게 됐다.

 몇 해 전,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에서 산재사도직을 맡게 돼 재가 진폐환자들을 접하며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마치 '연탄재처럼' 버려져 있는 상황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같은 진폐환자이면서도 진폐증과 함께 앓는 합병증 여부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지는 현행 우리나라 진폐제도로 인해 요양 승인을 받은 이들과 합병증 인정 기준에 미달하는(?) 재가 진폐환자의 삶은 천당과 지옥으로 갈렸다. 산재보험의 양극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진폐환자들 현실이다.

 얼마 전 성목요일, 산재사목팀 실무자들과 서울 신당동에 있는 올해 일흔 다섯 살의 재가 진폐환자 집을 찾아갔다. 함태광업소와 대성탄좌 등에서 30여 년 광부 생활로 그에게 남겨진 것은 진폐증 13급에 호흡 곤란뿐이었다. 곁에 있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만큼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평생을 함께해온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그 분은 8년째 홀몸노인으로 살아오고 있다. 보증금 500만 원에 달마다 20만 원씩 내는 사글세가 밀려 보증금마저도 두 달 치밖에 남지 않았단다. 정부와 사회, 가정에서 모두 외면해 그 작은 공간마저 덥히지 못하고 냉기 속에 소외되고 방치된 그분의 가난과 참담함은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했다. 차디찬 방바닥에 깔고 앉으라며 내놓은 방석 한 개와 우리를 보고 마시라며 품 안에서 꺼내주는 뜨끈한 캔 커피 두 개가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를 연상시켰다.

 4남 1녀 자녀들과도 연락이 끊기고, 노령연금 8만원이 지급된다고 해서 그동안 받던 교통비와 지원금 5만원도 중단돼 버렸다. 그 분은 얼마 전, 서울 용산역 근처에서 3만 원에 구입한 군용 침낭을 내보였다. 노숙자의 삶을 준비해 놓은 것이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밤'이건만, 우리는 그분을 팔아넘기며 모른다고 도망치는 '배반의 밤'이다. 산업역군이자 전사였다는 수식어만 줄 게 아니라, 우선적으로 재가 진폐환자를 돌보고 보호하기 위한 합리적 제도 개선이 하루빨리 이뤄지길 바란다. 또한 우리 사회 그늘진 곳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나눔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부활 기쁨이 이들과 함께하길 희망한다. - 2008. 04. 06발행 평화신문 [9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