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정 신부(의정부교구 청소년사목 7,8지구 전담)
어느 날 미사가 끝나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는데 고3 남학생이 조용히 다가오더니 눈을 아래로 깔며 나직히 말했다.
"신부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 녀석이 무슨 비밀이 있는 게로구나'하고 생각하며 센스있게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 무슨 일이니?"
그 친구는 잠시 머뭇거리다 "성경에 보니 예언자들은 미래도 예언하고 그러던데 신부님도 제 미래를 볼 수 있으신가요?"
'응?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하고 고민하며 그 친구 눈빛을 보니 상당히 불안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들어보니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얼마 전에 치른 중간고사를 망친 탓에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모님 몰래 사귀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지게 됐다는 것. 게다가 여자친구의 일방적 이별 통보 이유인즉슨, 어떤 대학생과 사귀게 됐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정말 살고 싶지도 않다는 고민이었다.
어느 것에 초점을 맞춰 상담을 해줘야 할지 고민이 됐다.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시험을 망친 것? 부모님 몰래 여자친구를 만난 것에 대한 죄책감? 여자친구에게 버림받은 배신감과 허전함?
어른 시각으로는 찬물에 세수 한 번하고 다시 열심히 공부하면 해결될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사안일지 모르지만 청소년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다. 청소년은 그만큼 나약하고, 여차하면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로가 바뀔 가능성도 크다.
나는 "너 지금 많이 힘들지?"하고 물었다.
녀석은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신부님… 저, 정말… 죽고 싶어요. 저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하며 꺼이꺼이 울었다.
그 친구는 1시간 이상 속마음을 털어놓다 마음이 좀 풀렸는지 또 물어봤다.
"신부님, 전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허참… 이 녀석, 내가 무슨 도사님쯤으로 보이나. 하지만 한 마디 정도는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관찰당하지 말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돼봐. 이 세상도 그리고 미래도 다 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말이야."
그리고 문득 어느 소설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났다.
"네가 곧 만나게 될 미래의 세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지지 않니?"
이 감수성 예민한 녀석은 뭔가 새로운 희망을 찾았는지 "다음에 힘들 때도 또 신부님 찾아와도 돼요?"하고 묻는다.
난 물론 그러라고 했고, 그 이후로 그 친구는 다시 날 따로 찾지는 않았지만 가끔 성당에서 마주치면 환하게 웃는 모습 정도는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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