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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北 주민에게 꼭 묻고 싶다

namsarang 2010. 8. 18. 22:20

[박두식 칼럼]

 언젠가 北 주민에게 꼭 묻고 싶다

 

박두식 논설위원

거듭된 수해와 기아로 벼랑 끝에 선 북 주민들은
김정일 꼭두각시 노릇 하고 북 체제 두둔에 열 올리는
남측 인사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북한의 여름은 잔인한 계절이다. 북한 수해(水害)가 처음 국제적 뉴스가 됐던 1995년 이후 해마다 크고 작은 홍수가 계속됐다. 여름 물난리는 각종 수인성(水因性) 질병을 부르고, 다음해 봄까지 기아(饑餓)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시작이다.

1995년 홍수는 북한의 국가 기능을 무너뜨렸다. 이재민만 북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20만명, 120억달러의 재산피해(통일부 추산)가 발생했다. 120억달러는 2008년 북한의 전체 교역량 69억달러(미국 의회조사국 집계)의 두배 가까운 돈이다. 1990년대 중반의 수해와 뒤이은 질병·기아로 100만이 넘는 북한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대량 탈북(脫北) 사태가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올여름에도 어김없이 수해가 북한을 덮쳤다. 북한 관영 매체에 따르면 개성에 50년 만의 최대 폭우가 쏟아졌고, 함경남도 흥남·신흥 등 곳곳에서 물난리가 났다. 북한은 상세한 피해 규모는 밝히지 않은 채 "2000년대 들어 최대"라고 했다.

1990년대만 해도 북한에서 수해가 나면 국제사회가 돕겠다고 나섰다. 한국은 1995~96년 2년 동안 쌀 15만t을 포함해 정부·민간 합쳐 모두 2000억원 가까운 대북(對北) 지원을 했다. 그러나 올해는 어느 누구도 대북 지원에 앞장서지 않고 있다. 국가의 기본적 기능인 치수(治水)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돈이 생기면 핵·미사일 개발에 쏟아붓고 김정일과 그 주변 권력층의 사치품 구매에 탕진해 온 북한을 돕는 데 모두가 지쳐버린 것이다. 김정일 때문에 북한 주민이 겪게 될 고통의 크기만 커졌다.

한상렬 목사의 방북(訪北)은 시기적으로 북한의 수해와 겹친다. 그가 북한에서 뭘 보고, 무엇을 하고 누굴 만났는지는 북한 관영 매체 보도 외에는 달리 알 길이 없다. 북한 매체에 실린 사진 속의 한 목사는 늘 환하게 웃고 있다. 남한의 각종 반미(反美)·반정부 시위 현장에서 보던 날 선 표정의 그가 아니다. 한 목사는 "남녘 동포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어른을 공경하는 겸손한 자세, 풍부한 유머, 지혜와 결단, 밝은 웃음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들이 가장 힘들 때 찾아와 김정일의 꼭두각시 노릇을 자처한 한 목사를 보면서 북한 주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언젠가 북한의 문(門)이 열리면 꼭 묻고 싶은 질문이다.

북한 식량난이 최고조에 달했던 1996년 가을의 일이다. 평소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와 자주 접촉하던 사람으로부터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미국 할리우드 영화 비디오 테이프 수십편을 구하느라 바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여름에 막 개봉한 '스트립티즈(striptease)'를 꼭 보내라고 했는데 비디오로 나오지 않아서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데미 무어가 반라(半裸)로 출연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그 영화를 김정일이 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백성이 굶주리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분개했다. 이 이야기를 했던 사람은 그 후 한국 보수진영 비판에 앞장서면서 유명해졌지만, 북한 권력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그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북한은 건드려선 안 될 성역에 가까운 존재인 모양이다. 야당도 이명박 정부의 인색한 대북 지원은 비판해도, 북한에 대해선 입도 뻥끗하지 않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이런 남쪽 사람들을 자신들 편이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들의 삶만 궁박(窮迫)해졌다고 생각했을까? 이것 역시 언젠가 꼭 묻고 싶다.

레이건은 미국 현대사에서 반공(反共) 이념에 가장 충실했던 대통령이다. 그는 미·소(美·蘇) 냉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80년대 초 아프리카 공산독재 국가에 식량을 지원하면서 "굶주린 아이는 정치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미국이 인도적 지원에 인색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의 원칙도 훼손하지 않는 방안을 이 외교적 수사(修辭)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 구절은 그 후 미국이 적대 국가에 인도적 지원을 제공할 때 상용하는 문구가 됐다. 여기에 비하면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은 풀리지 않는 남북관계만큼 답답하다. 북한은 매년 100만t 이상의 식량이 부족하고, 우리는 140만t이 넘는 쌀 재고를 처리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이런 한국 정부를 어떻게 생각할까. 요즘 북한 정세를 보면 이런 질문들을 실제 할 수 있게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