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복음]
왜 선교하나
▲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
오늘은 교회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와 활동에 대해 생각해보는 전교 주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오늘은 한국 교회에 쓴소리를 좀 하려 합니다. 선교에 관한 교회 통계나 선교 관련 뉴스를 보면 대부분 양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주교회의 교세통계 양식도 신자 수, 신심 단체 수, 주일학교 학생 수 등 대부분 양적 통계 위주입니다.
전교 주일이나 전교의 달(10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OO가 OO명을 교회로 이끌어 세례를 받게 했다. 그래서 그는 훌륭히 선교 활동을 한 신자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통계를 통해 영세자 증가 수치를 보는 것은 분명 교회의 선교 사업을 진단하고 계획을 세우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교 교령 제1항에서는 “교회는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 하느님께로부터 만백성에게 파견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 상황이 일어나는 현실 세계에서 세상의 소금이며 빛인 교회는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인도의 신학자 마이클 아말라도스는 “선교의 원천은 삼위일체 내부에 있으므로 개종을 촉구하는 말씀의 선포만이 아니라 토착화, 다른 종교와의 대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교회의 선교 사명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선교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비오 12세 교황(재위 1939~1958)까지는 “그리스도교에만 진리가 있다. 선교의 목적은 세례의 은총을 입어 내세에서 천국에 들 가능성을 부여받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임 요한 23세 교황(재위 1958~ 1963)이 「사목자들의 원리」에서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암흑 속에 있는 것은 아니며 복음의 찬란한 빛을 아직 전면적으로 받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선교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 ‘복음화’, ‘복음선교’를 세상 속 복음 선포 행위뿐 아니라 교회의 사명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합니다. 복음의 힘으로 모든 사람을 내적으로 쇄신시켜 하느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위반되는 모든 인간의 판단 기준, 사상의 동향, 가치관과 생활 방식 등을 바로 잡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화에 대한 평가를 양적인 수치로 하기보다는 ‘한 해 동안 한국의 사회가 어느 정도 예수님 가르침에 가깝게 다가섰는가?’를 비교 분석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신뢰, 정의, 사랑이라는 실체가 교회와 사회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양적 주의’에 대한 폐단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세계에서 범죄율이 높은 도시들은 대부분 가톨릭 국가에 있습니다. 바티칸, 브라질 상파울루, 멕시코시티, 마약으로 유명한 콜롬비아의 보고타 등 너무나 많은 가톨릭 도시가 소돔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제가 선교 활동을 했던 페루의 리마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침부터 마약에 취해 살인을 저지르고도 기억을 못 하는 젊은이들, 버스 정류장에서 흉기를 휘두르는 괴한에게 시민이 휴대전화나 돈을 빼앗기는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주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약간의 허점을 보이면 소매치기가 붙습니다. 정말 범죄와 함께하는 문화입니다.
500여 년의 가톨릭 역사를 지닌 중남미는 인구의 70% 이상이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 모습은 어떠합니까? 개신교인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이 국민의 50%가 넘는데 범죄율과 삶의 형태는 앞서 언급한 ‘범죄 도시’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마이클 시겔(신언회) 신부는 “선교는 구원으로 초대하는 모든 활동과 말씀이며, 구원이란 모든 것의 화해”(콜로 1,20)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훌륭한 선교사가 돼봅시다.
'생활속의 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일 만나는 하느님 (0) | 2015.11.01 |
---|---|
참 사제이신 예수님 (0) | 2015.10.25 |
부자와 좋은 사람 (0) | 2015.10.11 |
위로와 사랑의 축제를 (0) | 2015.09.27 |
“조상님들, 존경합니다!” (0) | 2015.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