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생활 속의 복음] 인간으로 태어나 알게 된 하느님

namsarang 2016. 6. 12. 12:05

[생활 속의 복음]

인간으로 태어나 알게 된 하느님

 

연중 제11주일(루카 7,36-8,3)


 

▲ 주수욱 신부(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주임)



어느 날 지구라는 별에 왔습니다

60년도 더 된 과거의 어느 날, 나는 지구라는 별에 태어났습니다. 자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걸 모른 채, 인간으로서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억할 수 없는 과거 어느 날, 내가 인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지구에 내가 적응하는 것은 지금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수없이 많은 세포로 이뤄진 내 몸 안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발생하면 때로는 치명적이기도 합니다. 내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자라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남들이 정해 놓은 복잡하고 규격화된 삶의 기준에 적응해서 살아야 합니다. 말도 배워야 하는데, 인간이 사용하는 말은 동물들의 세계에는 없는 것입니다. 갈수록 섬세한 말을 알아들어야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또 부모님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랑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쉬운 일인 것 같지만, 어른이 되어도 사랑받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일들에 무관심하면서 일생을 마치는 불행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어느 날 보니, 친구들도 나에게 경쟁 상대가 되어서 다가왔습니다. 이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평생 노력해도 잘 안 됩니다. 사춘기가 되어서 이성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기보다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일 뿐입니다. 이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이기주의로 살아가게 된다면 모두 죽어 버리고 맙니다. 인간이 죽는 것뿐만이 아니라 산천초목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지구라는 별에는 하느님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하느님(神)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많은 하느님이 존재합니다. 특히 무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사는 한국인의 역사 속에 많은 신이 등장합니다. 중국에 가도 그렇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위력 앞에 노출된 일본은 더욱 그렇습니다. 종교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인도에 가면 수많은 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신들, 아메리카 대륙의 신들도 무수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많은 신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많은 신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신을 그리워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 신이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20세기에 정치권력을 장악한 유물론적 공산주의는 끔찍하게 수많은 인간을 파괴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나는 어릴 적에 어머니와 함께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라틴어로 하는 미사에 끌려다니고, 사춘기에는 스스로 성당에 갔습니다. 그때에 예수라는 분이 서서히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온 세상에 예수님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은 싫어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이해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성모님은 절에 모신 부처님과 보살님 정도로 여겨지고 맙니다. 교회에 나와서 알게 된 신이나 세상에 많이 모습을 드러낸 신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맙니다. 즉,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시는 하느님, 잘못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시고 고통을 가하시는 하느님, 열심히 빌면 복을 내려주시고 화를 면하게 하시는 하느님으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볼 수 없으니 아무렇게나 하느님에 대해서 적당히 둘러대면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종교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알려진 하느님은 전혀 새롭습니다. 물론 성경이 기록된 그 시대와 그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낯선 하느님, 그러나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교회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성부로부터 파견된 아드님이십니다. 그분의 모습은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보면(루카 7,36-50)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파격적입니다. 그 고장의 유명한 창녀가 예수님께 행하는 행위들은 참으로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이 여인과의 만남에서 드러난 하느님은 인간이 예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르게, 많은 빚을 탕감해 주는 하느님, 인간에게 한없이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빚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말미암아 창조의 세계에서 주인처럼 살게 되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참고 1베드 1,4). 인간을 일방적으로 사랑해주고 그치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야 하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연인 사이처럼, 인간과 사랑을 주고받고자 하는 하느님입니다. 올해 온 세상의 신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마음에 새기면서, 하느님을 닮아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