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복음] 끈질기게 하느님께 졸라야
연중 제29주일 (루카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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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수욱 신부(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주임) |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과부가 고약한 사람을 만나 매우 억울한 일을 당한 모양입니다. 재판관이란 자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이라고 합니다. 오로지 돈만 좋아한 사람인가 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그 지위 높은 법조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찾아가서 조르기라도 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가난하고 억울한 과부가 하도 졸라대니까 하느님도 무시하고 사람도 뵈는 것이 없던 그 재판관이 그제야 올바른 재판을 내려주었답니다. 조르지 않았으면 올바르지 않은 재판을 내렸다는 얘깁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 있으면 죄가 없는 것이고, 돈이 없으면 죄가 되는가 봅니다.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는 힘없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활동하셨습니다. 오늘도, 불의한 세력 앞에서 살아가는 힘없고 고통당하고 억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고 하느님께 나아가서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도 그 억울한 과부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과부와 적대적인 관계, 즉 가난한 사람들을 못살게 하는 사람들 편에 서거나 무관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은 힘 있는 사람들 편에 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소한 그런 사람들 편에서 침묵을 지킵니다. 그러면서 중립을 지킨다고 주장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방관하면서,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위로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눈을 감고 귀를 닫아버리곤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억울한 일을 당한 그 과부입니다. 그는 용기를 내서 억울한 일을 비정한 재판관을 끈질기게 찾아가서 호소합니다. 오늘도 고통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서야 합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누가 대신해서 말해 주고 행동해 주길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힘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게 생겼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억울한 일을 많은 이들이 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대신 나서 주지 않습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한국 사회는 소수의 부자만이 잔치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은 형편없이 추락했습니다. 많은 아이가 이렇게 교육받아서는 그들의 가혹한 운명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게 됐습니다.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면서 절망 속에 세월을 보냅니다. 일자리도 불안하게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맨손으로 길거리로 쫓겨납니다. 그리고 비참한 노년기를 보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한 그 과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그 고약한 재판관과 같은 사람들을 찾아 나서서 끈질기게 행동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웃음을 자아내던 극우 정치인들이 이제는 세계 정치 세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제 가난한 대중이 일어나서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면서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감나무 아래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라는 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살아나기 위해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면서 ‘공동선’을 위해 투신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살아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휘청거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하면서 비틀거리는 현대인이 정의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와서 올바른 구원의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온 세상이 어려움에 부닥치면 부닥칠수록,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시어 우리를 올바로 살도록 해주시는 하느님 나라가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대로,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품고 꾸준히 기도하면서 살아남아야 합니다.